[佛敎]/唯識講義

『唯識』- 실상에 머리숙여 예배한다 (강의 - 3. 언어문자는 공하다)

경호... 2011. 9. 6. 04:54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실상에 머리숙여 예배한다 (강의 - 3) 단지 명자(名字)만 있는 것이니, 명자의 성품은 공(空)한 것으로 실제 존재하는 것이 없다. 아주 중요한 말을 했어요. 선가에서는 이런 언어문자는 공하다고 누차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는 반드시 언어문자를 매개로 해서 사물을 봅니다. 그런데 실제 대상은 매 순간 찰나찰나 변하기 때문에 일정한 모양과 색깔이 없어요. 그렇지만 언어를 매개로 해서 사물을 보면 모양과 색깔이 있고 언어에 의해서 보이는 대상이 고정화됩니다. 그래서 언어문자는 대상을 고정화 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럼 실제로 가만히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뭘까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실제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문자를 인식하는 겁니다. 문자가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은 늘 대화할 때도 언어문자에 거의 100% 속고 산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여기 찻잔이 있어요. 실제의 찻잔은 던지면 깨져버리는데 찻잔이라는 말은 안 깨집니다. ‘아이고 그 찻잔 참 예쁘고 좋지!’ 이렇게 10년 전, 100년 전의 찻잔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찻잔이라는 이름은 100년, 200년 지나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실제의 찻잔은 수많은 세월 동안에 존속하는 것도 있지만 모양과 색깔이 아주 조금씩 계속 바뀌어서 결국 부서지거나 깨지고 없어져요. 그게 진실인데 우리는 찻잔이라는 개념, 찻잔이라는 언어는 그런 마음에 있는 거죠. 이렇게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마음을 움직이는데, 이때 이 마음은 이미지로 바뀝니다. 그 이미지가 바깥으로 투영되어서 대상 노릇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능가경』에서는 ‘보이는 이 세계는 마음이 투영 되어서 보일 뿐이다. 마음의 그림자다.’이렇게 얘기합니다. 원효스님은 ‘눈에 보이는 이 대상은 사실은 자기 마음이다. 마음이 대상화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게 고정 된 거죠. 이미지화 되어 있는 거죠. 실제 대상은 매 순간 찰나찰나 변하기 때문에 사실은 모양과 색깔이 없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여러분이나 저나 다 비슷하기 때문에 모양과 색깔을 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가 와서 보면 모양과 색깔을 그대로 안 봅니다. 잠자리가 와서 봤을 때는 아주 다르게 보여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연예인 중에 유명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 유명한 사람을 연못으로 데리고 가면 이 유명한 사람을 보기 위해서 물고기들이 앞 다퉈 모여들까요, 도망갈까요? 도망가죠? 왜 그럴까. 여러분들은 이 사람이 종로 복판에 나타났다 하면 인산인해를 이룰 텐데. 사람이 보는 이 사람하고 물고기가 보는 이 사람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죠. 왜냐하면 물고기가 보는 마음하고 사람이 보는 마음하고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똑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동물이나 사람이 보는 것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물고기들은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도 유명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괴물로 보는 거예요. 그럼 모기는 어때요? 모기는 사람을 밥으로 생각하죠? 개나 닭이나 소나 원숭이는 사람을 보면 피하는데 모기는 끝까지 달라 들죠? 이렇게 보는 시각이 다른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문자가 공하다는 말은 어떤 겁니까? 대상화 될 수 있는 것은 언어문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겁니다. 그래야 주객이 없는 자리, 실체로 들어가죠. 마음이 투영되어서 나타나는 바깥세상은 가짠데 우리는 가짜를 진짜로 알고 살잖아요. 그러니까 문자가 공하다고 얘기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구체적 사례를 들어서 얘기하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경전 상에는 분명하게 우리의 본연의 마음, 모든 경계의 실상을 불성(佛性)이라고 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러나 선가(禪家)에서는 불성이라고 얘기 안 하고 일착자(一着子), 한 물건[一物], 본래면목(本來面目), 주인공(主人公)이라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불성이라는 말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 개념에 휩쓸리다보니까 거기에 말길이 생기고 의미길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런 것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화두라는 말을 씁니다. 화두는 단지 말 이전, 생각 이전, 그 자리만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이 불성이라고 딱 고정시켜서 얘기 안하는 거예요. 언어에 매이지 않게끔 하는 겁니다. 문자가 공하다는 것을 선사들은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선사들은 법상에 올라서 법문 하드라도 경전 있는 개념이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살짝 바꾸어서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가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제대로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명자의 성품, 명자의 본질은 공한 것이어서 실제 하는 것이 없다,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거울 속의 그림자는 허공과 같으며 허공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다. 거울 속의 상은 허공과 같고 허공은 거울 속의 상과 같다. 거울 속에 있는 물건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거울 속에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이 나타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그림에 떡이죠. 그러면 결국 형상은 있으나 실체는 없기 때문에 허공과 같다고 얘기 하는 겁니다. 그리고 허공은 거울 속에 그림자와 같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대승기신론』에 보면 각체(覺體), 깨달음의 바탕을 설명하는 부분에 ‘우리 본연의 마음인 각체는 허공과 거울과 같다’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거기에 주석을 하기를 ‘거울 속에 있는 그림자는 끄집어낼 수 없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뒤집어서 얘기하면, 바로 여러분 자신이, 우리들 자체가, 이 세계 자체가, 원래 거울 속에 있는 그림자와 같은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듣고 하는 것을 마음이라 생각하는데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울이 됐다 생각 한다면,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 냄새 맡고 맛보는 것, 몸으로 피부로 느끼는 것은 전부다 거울 속에 그림자죠. 이런 것을 이해하려면, 몸 삼매, 몸 사라짐 정도는 이해해야만이 팍 와 닿을 텐데, 이런 몸 사라짐 체험을 안 해본 사람은 ‘스님 말은 그럴듯한데 정말이에요?’ 하고 의심하게 되죠. 마음이 비어 버리면 몸도 비어 버리고, 보이는 세계도 비어 버린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밖에서 찾는 게 아니고 안에서 찾는 거예요. 비어진다 하는 것은 진실한 게 아니고 허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허상이 없어지는 거예요. 허상은 없어지지만 만들 수 있죠. 이렇게 만들 수 있고 없앨 수 있는 것은 모두 짝퉁입니다.ㅎㅎㅎ 짝퉁을 좋아할 정도 되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가 있습니다. 명품만 찾는 사람은 아직 명품 자체가 짝퉁과 같이 거울 속에 그림자인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색심(色心)은 허공과 같으며 허공은 색심과 같다. 색심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 거울 속의 그림자인 몸은 실제 몸과 다른 것이 없고, 또한 같은 것도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모든 부처님은 그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색심은 몸과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색즉시공 공즉시색 바로 나오죠? 물질은 바로 공이고 공은 물질이다. 『금강경오가해』보면 부처님은 개각(開覺)이라 했습니다. 개각은 반야(般若)고, 반야는 비춰보는 관조(觀照)다. 깨어있다는 말은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다, 현재도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과거심(過去心), 현재심(現在心),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이다, 과거형상, 현재형상, 미래형상은 더 불가득이죠. 그래서 마음이 과거로 도망가지도 않고 미래로 달려가지도 않아요. 현재 지금 늘 깨달아 있는 것을 깨달을 각(覺), 각이라 그래요. 미혹하지 않다 이 말이죠. 그게 부처님이에요. 그렇게 되려면, 거울 속에 그림자 같이 취할 것이 없고, 취할 것이 없으니 이름 붙일 것도 없고, 그러면 마음이 과거와 미래로 왔다 갔다 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그런 속에서 부처님이 출현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얘기를 했습니다. ㅎㅎㅎ 끝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