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실상에 머리숙여 예배한다 (강의 - 2)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몸의 실상을 관하듯 부처님을 관하는 것도 그렇다.
여기서 자타를 구분해 가는 게 볼 관(觀)자, 관이라 그랬죠.
관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얘기합니다.
허공 같아 의지할 곳 없는 실상(實相)에 머리 숙여 예배하니,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선정을 경험한 자리다.
머무름이 없어 근본이 없는, 이것을 깨달아야 부처님이라 한다.
허공 같이 의지할 곳이 없는 실상,
자와 타를 구분하는 것은
자라 하는 것도 실체가 없고 타라 하는 것도 실체가 없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게 실상인데 거기에 머리 숙여 예배 한다.
왜? 자타가 없는 청정한 자리니까.
마음이 청정하면 자타가 없는 거예요.
자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고 타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고
자아가 없음을 청정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는 머무름이 없고 근본이 없어 실체가 없다.
내가 주재하는 자아라할 만한 근본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님이다 이런 얘깁니다.
그런데 예배는 불보살님들께 예배한다 이러지
실상에 예배한다는 말 여러분 처음 들어보죠?
만일에 여러분들이 고난에 처해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서 여러분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면
고맙다, 감사하다, 머리 숙여 백배 사의를 표하죠?
그러면 실상이 뭡니까? 진실한 모습인데,
이 진실한 모습이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안 하면 안 되죠.
그렇다면 부처님 자체가 뭡니까? 실상이잖아요.
부처님 모습은 지혜와 자비가 구현되어 있는 모습이 부처님이에요.
지혜와 자비 본질이 실상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실상에 머리 숙여 예배하니,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선정을 경험한 자리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말은 주객이 없다는 말이죠.
‘머무름이 없어 근본이 없는, 이것을 깨달아야 부처님이라 한다.’
머무름이 없으니 근본이 없다는 말이고
근본이 없어야 이것을 깨달은 부처님이라 한다는 거죠.
근본이 있으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우리가 번뇌가 일어나가지고 욕심 부리고 화를 내고 온갖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자립되어 있는 뭐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그래서 근본적인 무엇인가 실체라든지 자아가 없어야 만이
누구든지 다 평등하고 누구든지 다 관계성 속에
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이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데,
근본이 있다고 생각하면 밟고 올라서려고 하고 쟁취하려고 들고
이런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늘 일성평등(一性平等),
평등이라는 하나의 성품뿐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깨달으면 다 부처가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것은 자타를 잘 구분하는 데서
점점 깊이 들어가서 자타가 없는 자리에 들어가죠.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이것도 임시 명칭으로 부처님이라 하나
또한 부처님으로 이룰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이루거나 이룰 만한 것이 없고,
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할 만한 것이 없을 때에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하는 것이다.
보는 것이 없으면서 분명하게 보는 것이며,
분명하게 보면서 보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임시 명칭으로 부처님이라 하나
또한 부처님으로 이룰 만한 것이 없다.’
명칭도 그냥 어쩔 수 없이 부처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주객이 없는 자리에는 사실 부처니 중생이니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중생과 부처와 마음은 차별이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부처님을 이루거나 이룰 만한 것이 없고,’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본연의 마음자리, 실상 자리에서 볼 때는
이룬다, 이루지 못한다는 주객이 없다는 말이에요.
이룬다,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주객이, 자타가 나눠져 있지만
결국 자타를 떠나서 자타가 없는 자리에 들어가다 보면
그런 게 없다는 거죠.
또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할 만한 것이 없을 때에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하는 것이다.’
출현하거나 출현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은
본연의 마음자리는
사실은 부처라느니 중생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하는 것이냐.
중생들이 본래 중생이 아닌 줄을 스스로가 몰라요.
자기가 중생이라고 착각해서 하는 거죠.
여러분들은 자신이 중생이라 하지만 사실은 중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이랑 똑같이 평등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는 부처가 출현한다, 안 한다, 이런 게 없어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사실 그런 것을 모르잖아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는 하지만
자세히 와 닿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중생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 중생에게 뭐가 필요 하냐?
그것을 잘 알면 부처님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출현한다 하는 것입니다.
용수보살 말씀에
‘불생불멸의 열반에 들어 있으면서
중생을 위해서 색신을 나타내서 중생 구제한다.’이렇게 얘기 한 겁니다.
그래서 본연의 자리에서 보면 출현하고 말고 할 게 없다는 거죠.
그렇지만 고통 받는 중생이 있기 때문에
출현해서 그 중생을 구제하는 게 부처님이다.
이렇게 우리는 부처님과 늘 함께 하고 있는데도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에
‘아니, 부처님이 우리 곁에 있고 늘 함께 한다면
왜 우리는 부처님을 못 보는 겁니까?’
그러니까 마명보살이 하는 얘기가
‘업장이 두터워서 부처와 함께 있어도, 곁에 있어도 모른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해도
참회를 하고 내 업장을 닦아가면서 하면 감응이 금방 오는데
그렇게 정성스레 해도 아무 감응이 없다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은 참회도 안하고,
도대체 자기를 되돌아 볼 마음이 없는 거예요.
오로지 자기 원을 부처님 힘을 빌려 성취하려는 욕심만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감응이 오겠냐 이거죠.
그러니 기도는 수행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만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참회라든지 염불이라든지 같이 하면 기도 영험이 빠르죠.
‘보는 것이 없으면서 분명하게 보는 것이며,
분명하게 보면서 보는 것이 없는 것이다.’
보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보는 것이 없어야 만이 두루 다 보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보이지만
다른 것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럼 보는 대상이 없으면 다 본다,
한 대상에 보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전체 다 보고 있는 거예요.
전체 다 보고 있으니까 여기서 말하는
보는 것이 없으면서 분명히 본다,
뭘 보느냐? 실체 없음을 본다, 이런 말이죠.
무엇인가 있다는 실체 있음을 보면
그것은 볼지 모르지만 다른 것은 안 보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게 사유가 필요해요.
그리고 ‘분명하게 보면서 보는 것이 없는 것이다.’했는데
무엇을 분명하게 보느냐?
텅 비어있음을 본다, 실체 없고 자아 없음을 본다,
실체와 자아가 없음을 보긴 보지만
그것은 형상과 색깔이 없기 때문에 보는 게 아니죠.
그래서 보면서도 보는 게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보는 것이 없으면서 보고, 보면서 보는 것이 없다는 말은
주객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일체감을 이루고 늘 하나 됨 속에 산다,
하나 됨 속에 사니까 봐도 보는 게 아니죠.
주객이 없는데 볼 게 뭐 있습니까.
보긴 보는데 보는 게 없잖아요.
보는 게 없으면서도 주객이 모두 하나 되니까 보는 거죠.
또 다 보니까 주객이 없다 하는 것이죠.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해하면 금방 이해할 것이고
이런 이야기는 말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행해서 체험해봐야 된다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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