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에 대한 게송 (강의 - 9)
『수능엄경』에서는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知見)을 일으키고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
보이는 모습과 보는 지견에는 결정된 성품이 없어
마치 서로 서로 교차하여 의지해서 서 있는 갈대의 모습과 같다”고 하였다.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知見)을 일으키고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티끌경계는 보이는 대상, 이 세계에요.
지견(知見)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하면 견해인데,
좋다, 싫다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대상과 보는 지견은 서로가 의지해서 일어난다,
이렇게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은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거죠.
서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반드시 대상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보면 마음이라는 것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런 사실을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이 관계 하에서 우리가 앎이 생긴다는 것을
바르게 앎으로 해서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게 있으면 가지고 싶고,
싫은 게 있으면 밀치고 싶고, 화를 내고 이러거든요.
그래가지고 고통에 빠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보고 듣고 하는 것이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알면
가지고 싶은 것, 화내고 싶은 대상에 대해서
집착에서 멀어지는 거죠.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는 자체가 대상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생각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것이 관계성 속에서 생각이 매 순간 대상에 따라서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죠.
그래서 이런 진실을 여기서 밝히는 겁니다.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
눈이라는 근을 통해서 사물을 보면 모양과 색깔이 나타나죠.
귀라는 근을 통해서 소리가 나타나고, 코라는 근을 통해서는 냄새,
혀라는 근을 통해서 맛, 몸이라는 것을 통해서 촉각이 나타나죠.
그래서 근에 의해서 모양과 색깔이 나옵니다.
근(根)은 부진근(扶塵根, 依處), 정색(淨色, 勝義根) 두 종류가 있습니다.
부진근은 눈, 귀, 코, 혀, 몸이고
정색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이 부진근하고 같이 작용하는 겁니다.
근을 유식에서는 종자라고 얘기 합니다.
종자는 정보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전생에 사물을 보았던 것을 아뢰야라는 마음에 저장이 되어있는데
이게 정보입니다.
그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한 것이 마음[아뢰야식]에 저장 되어 있다가
육신이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
아버지 정자와 어머니 난자가 만나면서 유전인자가 형성이 됩니다.
아뢰야식이 부모의 형상을 본 따서 자기 육신을 만들어 내는데
이 때 전생에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한 그 정보를 활용해가지고
눈, 귀, 코, 혀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저장되어있는 정보를 가지고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부진근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와
정색(淨色), 승의근(勝義根)이 작용을 해서
눈, 귀, 코, 혀의 역할을 합니다.
‘보이는 모습과 보는 지견에는 결정된 성품이 없어
마치 서로 서로 교차하여 의지해서 서 있는 갈대의 모습과 같다’
보이는 모습하고 보는 지견이라는 말은
근(根 : 눈, 귀, 토, 혀, 몸)에서 보이는 대상이 있고
그로서 인식하는 주관, 지견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보이는 모습인 객관과
보는 지견, 주관이 같이 맞서고 있는 거죠.
이렇게 주관과 객관이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
마치 갈대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습이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주관과 객관 차이 속에
찌지고 볶고 싸우고 하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학문적인 것 등
모든 것이 주관과 객관 속에 다 일어나는 거죠.
그러면 해결 방법은
객관이 사라져버리면 주관이 사라지고
주관이 사라지면 객관이 사라져버립니다.
여러분 공부를 하다보면
몸이라고 하는 객관이 사라져버리면
몸하고 관련된 심리가 다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몸도 내 마음에 그림자고 보이는 세계도 내 마음에 그림자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 버립니다.
여기서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을 일으킨다는 것은 견분(見分)이다.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는 것은 상분(相分)이다.
볼 견(見)자, 나눌 분(分)자, 보는 부분, 주관이라는 부분이다 이런 얘깁니다.
상분은 모습으로서의 어떤 부분을 얘기하죠.
어떤 모습이 있게 되는 것은 근으로 말미암아서 그렇다.
상분과 견분에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것은
마음과 경계가 서로 생겨나게 하나,
제각각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이다 경계다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서로 의지해서 생겨난다,
경계는 마음, 특히 근에 의해서 나타나고
또 그 근을 통해서 나타난 경계에 대해서 마음이 일어나고 하는 것이죠.
‘제각각에 있어서는’ 라는 말은
견분이면 견분, 상분이면 상분을 분리시켜서 봤을 때는
사실 스스로의 실체는 없다는 얘기에요.
마음은 스스로 혼자 설 수 없으므로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을 일으킨다.
경계가 스스로 생겨날 수 없으므로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
두 가지 허망한 것이 서로 의지하는 게
마치 홀로 설 수 없어 서로 교차하여 의지하는 갈대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마음은 스스로 혼자 설 수 없으므로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을 일으킨다.’
대상을 봄으로서 저것이 무엇 무엇이다 하고 인식하는 거죠.
그러니까 경계를 내는 거예요.
‘경계가 스스로 생겨날 수 없으므로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
경계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근(눈, 귀, 코...)을 통해서 있다는 것이죠.
‘두 가지 허망한 것이 서로 의지하는 게
마치 홀로 설 수 없어 서로 교차하여 의지하는 갈대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마음은 혼자 스스로 설 수 없다는 것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얘기하는데
결국 주관과 객관은 서로 상대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지
주관, 객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 하는 것을 여기서 밝힙니다.
여러분과 얘기할 기회가 있어서
왜 그리 화를 내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상대가 자꾸 화를 내게 하니까 화가 났다 그래요.
그 화가 났다는 말은
경계에 의해서 내 마음이 화가 났다 이 말이거든요.
이렇게 근에 의해서 일어난 경계는 가짜죠.
아뢰야식에 종자가 발현되어서
대상화 되어가지고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진짜가 아니라는 겁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켜가지고 대상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전자현미경으로 대상을 살펴보면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입자는 공간적이고 파동은 시간적인데
이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이 말은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는 거죠.
물질적인 요소라고 하는 게 그런 거예요.
사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하고 원자와 전자가 돌고 있는 모습인데
그것이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모양과 색깔이 잡히잖아요.
모양과 색깔이 잡히는 이게 뭐냐 이거죠.
이러한 경계를 누가 만들어 내느냐?
마음이 만들어 낸다 이거죠.
아뢰야식 종자, 과거에 보고 듣고 했던 그 마음이
바깥으로 투영되어서 나타난 거고[객관],
그것을 주관인 마음이 인식하는 거죠.
그래서 보이는 객관도 마음이고 보는 주관도 마음이다.
보이는 대상도 진실하지 않고 보는 마음도 진실하지 않다 그런 얘깁니다.
그러므로 지견(知見)에 알았다는 주장을 세우면 무명의 근본이 된다.
지견(知見)에 달리 보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열반이 된다.
단지 확실하게 보면서 볼 것이 없다면 법계에 통하여 보는 것으로 열반이다.
만약 확실하게 들으면서 들을 것이 없다면 법계에 통하여 듣는 것으로 열반이다.
일체제법이 본래 열반이나 분별심의 허망한 견해로서 간격이 생긴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리어 무명이 된다.
‘지견(知見)에 알았다’
내가 대상을 보고 ‘저것은 무엇이다’하고 아는 것은
전부다 무명의 근본이 된다 이런 말입니다.
무명이라는 말은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하죠.
쉽게 말하면, 내 밖에 따로 자립되는 무엇이 있다고 인식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무명, 깜깜한 마음이다 그거죠.
사물을 볼 때 저것이 무엇이다 라고 인식이 일어나려면
보는 마음하고 보이는 대상이 접촉이 일어나야 돼요.
접촉이 없으면 저것이 무엇이다 라고 앎이 생기지 않습니다.
『염수경(念受經)』에
접촉되는 순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일어나는데
접촉과 감각은 알고 보면 무상하게 변한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야 된다고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접촉에서 일어나는 심리를 잘 모르니까
실제 내 밖에 따로 있는 것 같이 착각을 해서
욕심을 부리고, 화를 내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접촉하는 것도 매 순간 바뀌고
접촉의 근본에서 일어나는 감각도 매 순간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판단 중지가 일어나고 인식의 흐름이 끊어져 버리고
그러면서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매 순간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전체와
주관, 객관이 나눠져 있지 않는 하나 됨 속에
일체감을 이루면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 삶을 아름다운 삶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하는 얘기는 그런 얘깁니다.
늘 일체감을 이루고 하나 됨 속에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것이죠.
인식의 대상이 우리 눈 밖에, 귀 밖에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식의 대상은 인식 속에 있다고 하는 게
불교인식논리학에서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지견(知見)에 알았다는 주장을 세우면 무명의 근본이 된다.
지견(知見)에 달리 보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열반이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식에 대해서
지견을 일으키는 주체라든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열반에 든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생각이 일어나게 되면 그 생각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 생각 일어나는 게 자기 삶의 전부고
한 생각 사라지는 게 자기 삶의 전부예요.
항상 얘기 했듯이 지나간 과거는 돌아오지 않아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고, 현재 이 순간만 있기 때문에
현재 이 순간에 일어나는 생각이 자기 삶의 전부인거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생사(生死),
일어나는 게 생이라 하고 사라지는 게 사라 한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본질을 꿰뚫어 보면,
지견이라 하는 것, 생각이라 하는 것이
알고 보니까 주체도 없고 실체도 없고
그 안에 아무것도 없구나 알게 되면
바로 생도 아니고 사도 아닌
여기서 얘기하는 열반으로 들어간다는 거죠.
‘단지 확실하게 보면서 볼 것이 없다면’
웃으면서 웃을 것이 없다면, 슬프면서 슬플 것이 없다면
이 말은 모양만 있지 실체가 없다는 말이죠.
‘법계에 통하여 보는 것으로 열반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다는 말이죠.
보고 듣고 하지만 주체는 없다,
단지 보는 것만 있고 듣는 것만 있다 이거죠.
그런 것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열반이다 이런 얘깁니다.
‘만약 확실하게 들으면서 들을 것이 없다면
법계에 통하여 듣는 것으로 열반이다.’
들으면서 들을 것이 없다는 말은
듣긴 듣는데 듣는 실체도 없고 듣는 자아도 없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
들으니 없다는 게 아니다 이거에요.
들으니 없다고 귀를 탁 막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런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듣긴 듣는데 듣는 실체도 없고 보는 주체도 없다,
그래야 듣는 거예요.
만일에 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첫 번째 독립되어야 되고
두 번째 관계를 끊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있다’ 하는 것은 알 수 없죠.
알 수 없는 것은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없는 거 하고 같은 거죠.
그래서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벌써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이거죠.
변하는 존재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범하고 오류하고 있는 얘기가
‘하나님은 절대 불변하다’ 합니다.
절대 불변하다면 인식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알 수 가 없는 거예요.
왜?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하는 순간
불멸하다고 얘기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럼 작용하려면 관계를 가져야 하니까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있으려면 작용도 없어야 됩니다.
관계를 가지면 변하는 거예요.
그러면 작용이 없는 하나님이라면
삼라만상 우주를 어떻게 창조했다고 얘기할 수 있느냐 이거에요.
창조했다면 작용이 일어나고
작용이 일어나면 영원히 불멸하지 않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영원 불멸할 수 있느냐, 창조 했는데..
그래서 신학에도 과정신학이라는 게 있는데
하나님도 계속 상속해 가고 있다, 이런 학설도 나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실체가 없고 불멸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하고 관계가 없으니까
백날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기도하면 응답이 있어요.
부처님이나 보살은 유일무이한 절대자의 모습으로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빈 골짜기처럼 텅 비어 있어요.
그 골짜기에 대고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듯이
불보살은 텅 비어있는 존재기 때문에 응답이 오는 거예요.
실체가 비어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일어나고 사리지는 게 없는 거예요.
예를 드리는 중생과 예를 받는 불보살 관계는
참성품이 융기한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럼 불보살은 변하는 존재가 아니냐.
변하는 존재가 맞긴 맞지만 실체라는 자아가 비어있기 때문에
변하기는 변하지만 그 안에는 불변이 있다.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텅 비어 있다.
부처님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도 그렇다.
그래서 불보살에게 기도하면 기도에 응답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불보살 본질은 실체나 자아가 없기 때문에
유(有)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하고 같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하고 피조물하고 똑같다고 합니까?
안하죠.
그래서 그네들은 그런 모순에 빠져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을 마음으로 바뀌면
기독교도 불교하고 통하게 되죠.
불교의 창조주는 마음이죠.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하죠.
마음은 아는 것이 특성이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더라도 모르고 어떻게 창조합니까.
관계성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앎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거죠.
하나님의 속성은 앎에 있는 거예요.
앎은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마음이 만들은 거죠.
부처님도 마음이 만든 것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얘깁니다.
‘만약 확실하게 들으면서 들을 것이 없다면
법계에 통하여 듣는 것으로 열반이다.’
법계는 관계성이죠.
법계를 통하여 듣는다는 말은
관계를 통해서 듣는 것이다, 그게 열반이에요.
여러분 제 강의를 듣죠?
듣고 이해가 왜 생깁니까?
여러분하고 저와 관계[통로]를 통해서 연결돼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제 법문을 듣고 이해하는 겁니다.
법계를 통하여 듣는 것으로 열반이다,
왜?
듣기는 듣는데 듣는 주체도 없고 실체도 없다는 거죠.
앞에 들었던 것들 지나가버렸죠?
잡을 수가 없죠?
지금 또 계속 듣잖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안에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너무 간단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잊어버린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고 체득을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습관이 잘못 들어가지고
내 밖에 따로 자립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나도 자립하는 존재라고 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에 젖어 있다 보니까 관계를 잊어버리고
독립돼 있다는 생각이 꽉 차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해 됐다가도 일어서면 잊어버리고
법문을 들을 때는 ‘아! 그렇지’ 무릎을 치면서도
문 밖을 나가면 잊어버리는 거예요.
이 습관이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체득 시키는 게 바로 수행입니다.
‘일체제법이 본래 열반이나’
분별심이 허망한 견해는 ‘있다’, ‘없다’ 하는 게 허망한 견해죠.
자기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 마음은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독립되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거죠.
이렇게 알면 의식이 깨어나지만
그것을 모르면 무명, 깜깜해 지는 거죠.
‘일체제법이 본래 열반이나’ 이 말은
제법은 모든 법이죠.
법이라는 것은 원인과 조건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법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일체체법이 열반이라는 말은
원인과 조건이 만나서 일어나는 것이 현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 안에는 그 모습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이 있는데
그런 모습들이 텅 비어 있는 거예요.
자아라는 실체가 결여돼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화엄경』에
‘일체법이 그대로 열반이다’ 한 겁니다.
법이라는 공부를 다시 하자면,
여러분들, 결혼을 했죠?
결혼을 했으니까 집에 자식이 있죠?
그 자식은 법입니다.
그러니까 부부는 원인과 조건이에요.
서로가 원인과 조건이 되기 때문에 자식이라는 법이 생긴 겁니다.
그 다음에,
제가 여러분들 집에 아이가 있죠 하니까 ‘예’ 하고 대답했죠?
그 대답이 뭡니까?
그 대답을 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부르니까 여러분이 답을 했잖아요.
주관과 객관이 만났죠?
원인과 조건이 만나니까 ‘예’ 하고 대답을 했죠.
그것을 법이라 그럽니다.
또 집에 강아지가 있습니까? 물으면,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죠?
그럼 그 강아지가 있다고 한 것은 뭡니까?
묻는 사람과 듣는 사람, 주관과 객관이 있겠죠.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만나서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니까
그 대답은 법이라 이거죠.
그러니까 정신적인 현상이든 물질적인 현상이든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 소멸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 소멸했다 하는 것은
그 안에 고정 된 실체라든지 주관하는 자아라든지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열반이죠.
육체는 어차피 썩어빠져 없어지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영혼은 불멸하다, 이러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견해는 사견, 삿된 견해다 이겁니다.
불멸의 영혼은 늘 상속해 가는, 변화하는 존재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존재는 가변적이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계속 이어져가는, 상속해 가는 연속체는 유(有)가 아니죠.
또 변하니까 불멸이 아니죠.
그렇다고 소멸되어서 없는 무(無)도 아니죠.
그래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닙니다.
50분 전에 제 강의를 들은 여러분들하고
지금 듣는 여러분들하고는 달라졌다 이거죠.
50분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뀐 겁니다.
생각이 바뀌면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도 바뀝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런 시각에서 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불멸이에요.
우리 인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모습만 달라질 뿐이지
마음이라는 연속체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이에요.
인간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관계성 속에 있는 존재는
계속 모습만 바꾸고 갈 뿐이지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존재다 이겁니다.
그래서 일체제법이 열반이다 이렇게 얘기 한 거예요.
그런데
‘분별심의 허망한 견해로서 간격이 생긴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리어 무명이 된다.’
이 말은, 그것을 알 수 있는 열쇠는 자기 마음이다 이거죠.
기독교는 갈 수 있는 곳이 지옥과 천국 밖에 없는데
불교는 일곱(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극락) 군데죠.
하나 더 있다면 유심정토 가면 여덟 군데죠.
선택의 폭이 불교인들은 넓다 이거죠.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과 천국은 불변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지옥은 한 번 가면 영원히 살아야 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괴롭겠어요?
이게 위에서 말하는 ‘분별심의 허망한 견해’다 이겁니다.
그런 견해가 있으면 이런 두려움이 생겨요.
그런데 착한 짓하면 천당 가고 악한 짓하면 지옥 간다,
이러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왜냐하면 나쁜 짓을 하면 지옥가지만
나쁜 죄보를 다 벗으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결정되어 있다면
자기가 나쁜 짓을 해서 한 번 지옥에 갔다면
아무리 죄보가 다 했다 하드라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면 골치 아픈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지옥은 안 가고
무조건 천국만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거죠.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돼요.
좋은 짓 아무리 많이 해도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이렇게 불합리 하다 이말 이에요.
이런 교화가 왜 생기느냐 하면
있다하는 견해, 유(有), 고정되어 있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인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리니 기독교인들은 굉장히 불쌍한 거예요.
자세히 생각해보면 사고가 굳어있는 거죠.
그러니까 어쨌든 자기들은 무조건 선한 거고
기독교 외에는 다 선하지 않아요.
그래서 무조건 선교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곤란하다 이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혹시 그런 사람 만나면 깨우쳐 줘야 되요.
지옥 가면 두렵죠?
지옥 가면 못 헤어나는 게 두렵지 않느냐고, 이렇게 얘기해줘야 되요.
오직 천국 가야 되지 않느냐고.
그래서 그렇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지옥에 떨어져도 벗어날 수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어보세요.
하나님에 의해서 지옥 가고 천국 가고 결정 되어 있지만
불교에서는 그런 것도 없이
내가 선한행위 하면 천당 가고,
악한행위하면 지옥도 가지만
그것도 참회 하고 죄보를 다 받고나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니 얼마나 좋으냐고,
이렇게 권유를 하면 아무소리 안할 거예요.
그래도 계속 자기 종교가 최고라고 얘기하면
당신 종교 소중하지요?
그러면 다른 종교도 소중하니까 서로 존중해 주는 게 좋습니다.
전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얘기 하세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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