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게송 (강의 - 8. 마음은 상속한다)

경호... 2011. 9. 2.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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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에 대한 게송 (강의 - 8) 또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根)에서 일어나는 식(識)의 활동이 근(根)에서 잠깐씩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습이 사슴이 그물망 속에 있는 것과 같고, 새들이 새장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이들 사슴과 새들이 갇혀 있는 굴레를 벗어나려 쪼다 포기하고, 굴레 속을 빙빙 돌다 다시 쪼기 시작하니 잠시도 쉴 여가가 없다. 그러니까 새장 속이나 그물망 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과 같다는 거죠. 여기에서 근(根)은 몸입니다. 근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意] 여섯 개가 있습니다. 이것을 유근신(有根身)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하필 왜 뿌리 ‘근’자를 쓰느냐 하면 뿌리는 영양분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내기도 하는 것처럼 눈을 통해서 대상을 보기도하고 대상의 위치를 받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기 보면 ‘근(根)에서 일어나는 식(識)의 활동이 근(根)에서 잠깐씩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습이 사슴이 그물망 속에 있는 것과 같고, 새들이 새장 속에 있는 것과 같다.’이랬죠. 우리 마음[識]이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서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합니다. 그것을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오랜만에 집에서 청국장을 끓였는데 저녁에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서 “아! 냄새 좋다.” 이런다면 마음이 코를 통해서 작용을 하고 향기가 코를 통해서 들어왔다가 나가는 거죠. 눈도 마찬가지고 귀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귀로도 사물을 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보죠. 그렇듯이 눈으로는 형상만, 코로는 냄새만, 귀로는 소리만, 혀로는 맛만, 몸으로는 촉감만 느끼는 겁니다. 이렇게 뿌리는 옮기지를 못하듯이 이 근(根)도 옮겨지지를 않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마음이 몸뚱아리 육근을 근거해가지고 대상을 인식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가 필요해요. 왜냐하면, 여기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데 차근차근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관계되는 조사어록에 공안(公案)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많이 인용을 했지만 적합하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육긍대부(陸亘大夫)가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에게 찾아와서 묻습니다. "옛사람이 병 속에다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거위가 점점 자라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을 깨뜨릴 수 도 없고 거위를 죽일 수 도 없으니, 어찌하여야 거위를 꺼내겠습니까?" 여기서 병은 몸, 거위는 마음이라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남전선사가 “대부!”하니까 육긍대부가 “예”하고 대답을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전선사가 “어? 나왔네.” 여기서 “예”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죠. 육체[병]를 분별해서 마음[거위]이 탁 튀어 나온 거예요. 육체도 안 깨트리고 마음이 튀어 나왔다 이 말이죠. 그와 같은 겁니다. 또 초기경전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여섯 개의 창문이 있는 집에 원숭이를 한 마리 넣어 놨는데 원숭이가 이쪽 창문으로 빼꼼, 저쪽 창문으로 빼꼼, 왔다갔다하는 비유를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때 원숭이는 마음을 비유하고 집은 몸을 비유하고 여섯 개 창문은 육근(六根)을 비유한 거죠. 그래서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육체라는 근(根)에 둘러 싸여가지고 여섯 개 구멍을 통해서 작용하는 겁니다. 또 비슷한 얘기가 용수보살의 저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아리 속에 불빛이 있는데 구멍을 뚫어주면 뚫어진 만큼 빛이 새어 나온다. 작게 뚫으면 불빛이 작게 비치고 크게 뚫으면 크게, 그리고 완전히 그 항아리를 부수어버리면 그 불빛이 사방으로 원만하게 잘 비춘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도 마찬가지다, 육체라고 하는 것이 둘러싼 안에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이 육체로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근에 갇혀서)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식(識)이 근(根)이란 굴레 속에 있는 것도 이와 같다. 혹 귀에 있기도 하고, 혹 눈에 있기도 하여 오고 가는 것이 일정치 않아 항상 있다고 집착할 수 없다. 코로, 귀로, 입으로 인식하는 게 일정하지 않는 거죠. 매 순간순간 대상 따라서 마음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비록 정해진 모습이 없을지라도 이어져 가는 모습은 계속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단멸하지 않는 것인가. 묘한 작용이 사이사이에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단멸하지 않는다는 거죠. 끊어짐이 없다, 상속한다 이 말입니다. 눈으로 사물을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귀로 소리 듣는데 이게 모두다 구멍이잖아요. 구멍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을 합니다. 인식을 하긴 하는데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단멸하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속한다, 계속 이어지며 끊이지 않는 심식, 상속식(相續識)이라 그럽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상속 하듯이 우리 마음도 계속 이어져 간다는 거죠. 계속 이어진다는 말은 무엇인가 있어서 이어지니까 무(無)가 아니고, 또 계속 상속해 가니까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유(有)도 아니다, 이게 우리 마음에 진실이에요. 지난 시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안 들은 사람을 위해서 다시 하겠습니다. 상속해 간다는 것이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그럼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버리고 나면 마음이라는 영혼은 소멸해버릴 것이냐, 아니면 영혼불멸이냐 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영혼불멸하다고 생각 한답니다. 기독교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지옥과 천국, 두 군데 밖에 없어요. 그런데 불교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일곱 군데입니다. 육도(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와 극락세계입니다. 물론 그 일곱 군데 중에서도 지옥과 천당은 있습니다. 이런 불교하고 기독교하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하면, 기독교는 영혼불멸하기 때문에 한번 천국 가면 천국에서, 지옥에 가면 지옥에서 영원히 못 벗어난답니다. 딱 결정되어 있다는 거죠. 이게 기독교식의 사고방식입니다. 불교는 지옥에 떨어져도 그 업이 다하면 벗어날 수 있고 천당도 갈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기독교는 안 되는 겁니다. 영원히 불멸한데 불멸한 영혼이 지옥에서 계속 못 헤어난다면 그 고통이 천 년, 만 년, 수억 년, 수 겁 생을 이어지는데, 아이고! 어떻게 합니까. 그죠? 그리고 또 기독교는 윤회를 인정 하지 않고 지옥, 천국만 인정하기 때문에 인과법을 얘기 안 합니다.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과보를, 악한 행위를 하면 악한 과보를 받는 다는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내세우면 신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과법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과 천국은 누가 보내주느냐? 내가 좋은 행을 해서 천국 가고 나쁜 행을 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결정하는 거예요. 악한 짓을 해도 ‘응, 넌 내 마음에 들었어.’하면 천국 보내고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응, 넌 내 맘에 안 들어. 지옥 가.’ 이렇게 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피조물은 조물주가 하라는 대로 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기독교가 그런 점이 문제가 있는 거죠. 또 하나의 문제는 영혼은 사람에게만 있고 동물한테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하죠. 사람이 죽으면 지옥 천당도 가지만 축생으로도 태어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해 다 결정 되니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그런 것 보면, 기독교 믿는 사람들 참 불쌍해요. 지옥 가면 어떻게 합니까? 참! 가슴이 아파요. 이런 얘기도 해야겠네요. 부모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할머니랑 같이 사는 6살 먹은 여자아인데, 아이를 유치원 보냈더니 3개월인가 다니고는 안 가는 거예요. 그 게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에요. 이 아이가 3개월 동안 혼자서 아이들 하고 선생님하고 줄기차게 싸운 거예요. 싸운 내용이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착한 일을 하면 천당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 간다는 것은 인정하는데 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안간 겁니다. 똑똑한 아이죠. 기독교는 그런 겁니다. 불신지옥이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거죠. 이런 것이 인간을 부정하는 그런 것인데 그 이면에는 영혼불멸설이 있고 하나님은 영원하다, 불멸하다는 사고방식이 있는 거죠. 이런 사고방식은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깨집니다. 전생을 기억 한다는 것은, 지옥이나 천국을 안가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지옥과 천국 밖에 없다 했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거냐 이거죠. 이게 모순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유물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영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도 동물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동물은 영혼이 없다, 이게 기독교에서 나온 얘기잖아요. 사람이 죽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태어나는 것도 없어야 되고, 계속 죽어서 없어져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 지구상에 인간이 한 명도 없이 다 소멸해 버려야 되는데 아이는 계속 태어나잖아요. 그렇다면 죽어서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죠. 그래서 관계 속에서 계속 상속하는 것, 여러분이 태어날 때하고 지금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죠? 왜냐하면, 태어나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마음이 매 순간 바뀌어 가면서 이어져 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계속 바뀌어 가는 게 진짜다, 고정 된 게 없다, 이걸 확실히 아셔야 됩니다. 여기서도 ‘어찌하여 단멸하지 않는 것인가. 묘한 작용이 사이사이에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 거죠. 그러므로 만약 범부가 색진(色塵)에 결박당한다면 자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법을 보면 한 가지 법의 장애를 받아, 법계에 원만히 통할 수가 없다. 여기에 색진(色塵),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진’은 티끌이죠. 서당이나 교실 바닥이 대부분 마루로 이루어졌죠. 이 마룻바닥을 청소할 때 보면 햇빛에 먼지가 드러나죠? 이것을 진이라 그럽니다. 마찬가지로 색진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세계는 마치 티끌같이 그 만한 존재라고 비유를 한 겁니다. ‘한 가지 법을 보면 한 가지 법의 장애를 받아, 법계에 원만히 통할 수가 없다.’ 법이라는 말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변현되어 나타난 것이 법입니다. 사과로 예를 든다면, 씨앗이 원인이 되고 흙, 물, 불[온도], 바람이 조건이 되어서 발아를 하고 열매를 맺죠? 그래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사과를 법이라 그럽니다. 이렇게 사과처럼 일일이 하나하나 지목해서 법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를 통 털어서 법이라는 말을 씁니다. 학습이 잘 되었나 확인을 해봐야 되요. 여러분 아이들은 법입니까, 법 아닙니까? “법이요.” 옳지! 이제 좀 됐네.ㅎㅎㅎ 그래서 범부[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모든 환영이 아뢰야식이라는 마음이 만들어낸 대상인줄 모르고 내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색진에 딱! 머물게 되면 ‘한 가지 법의 장애를 받아, 법계에 원만히 통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 때문에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한다면 이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보이는 이 세계는 원인과 조건이 만나서 생긴 세곈데, 여기에 머물지 마라. 그래서 형상에도 머물지 말고 소리에도 머물지 말고, 냄새, 맛, 촉감에도 머물지 마라 그랬죠. 우리가 보시를 하는데도, ‘아이고, 잘생겼으니까 보시해야 되겠다’, ‘목소리가 좋으니까 보시해야 되겠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죠. 이렇게 얼굴이나 소리에 머물러서 보시하는 것은 집착이라 그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