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게송 (강의 - 7. 독립된 존재는 없다)

경호... 2011. 8. 31.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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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에 대한 게송 (강의 - 7) 이와 같은 중생의 아뢰야식도 청정한 부처님의 성품이지만 범부의 지위에선 오염이 되고 부처님 자리에선 보배로구나.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얘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입니다. 아름다운 하얀 옥이 물에 있으면 물이끼로 때가 절어 덮여 버리듯 아뢰야도 생사 속에 처해 있으면 습기로 얽히어서 못 나타나네. 아뢰야라는 마음은 무의식이라는 마음인데 이 마음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닌 마치 종이로 비유하면 백지 상태예요. 이것은 언제든지 오염이 될 수 있고 청정해질 수도 있는 바탕이죠. 그래서 아뢰야식은 선으로든 악으로든 결정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무기(無記:avyakrta)라 그럽니다. 내버려두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물속에 있는 옥이 물이끼에 덮이면 보이질 않듯이 아뢰야라는 마음도 그와 같아서 삶과 죽음, 거기에 처해있으면 습기(習氣)로 되어서 안 나타난다는 겁니다. 습기라는 것은 습관적인 기운, 업(業 karma)을 얘기하는 겁니다. 반복적인 행위[생각, 말, 행동]는 모두 습기, 업에 의해서 그렇다는 거죠. 습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거예요. 말쑥하게 양복을 입고 있을 때는 전혀 이상한 행동을 안 하다가 예비군복만 입으면 사람이 이상해져가지고 말도 함부로 하고, 소변도 아무데나 누고 하죠? 그런 게 습(習)이라는 겁니다. 이와 같은 중생의 아뢰야식에 취하고 취해지는 두 가지 모습 뱀에게 두 개의 머리가 있어 즐거움 쫓아서 같이 가듯이. ‘취하고 취해지는 두 가지 모습’ 이 말은 대상을 취하는 주관과 취해지는 객관이 있는 거죠. 이 두 가지가 마치 뱀에게 머리가 두 개가 있다는 것 같이 아뢰야식에는 있다는 거죠. ‘즐거움 쫓아서 같이 가듯이’ 만일에 주관과 객관이 없다면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이렇게 주객이 없는 걸 선정이라 하는데 우리들은 보통 대상을 보고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분별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항상 즐거움 쫓아서 헤매는 거죠. 아뢰야식에는 주관과 객관이 나눠져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뒤에 파생된 마음들, 다시 말해 아뢰야식에서 나온 7개의 마음(말나식, 제6의식, 전오식)도 항상 주관과 객관이 나눠져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나는 게 있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주객이 나누어져 있는데 감각 쪽으로 작용하죠. 그런데 의식도 주객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감각이라 안하고 추리를 많이 합니다. 옳고 그름, 높고 낮음을 많이 따지죠. 아무개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얘기 했을까, 아마도 이러이러한 얘기일 것이다, 이렇게 추리를 많이 하죠. 말나식도 주관과 객관이 나눠져 있는데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면, 자아관념, 늘 ‘내’라는 걸 내세웁니다. 말나식도 옳고 그름, 높고 낮음을 따지고 분별하긴 하는데 그놈은 잠재의식이라 인식을 하더라도 마치 잠을 자는 것 같이 표가 안나요. 다만 그 인식 내용은 철저히 자아를 근거로 하는 게 특징이에요. 그 다음에 아뢰야식의 주관, 객관 나눠지는 것은 불가지(不可知)라 그럽니다. 알 수 없어요. 너무나 미세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이 작용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지금까지 얘기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좋은 것은 가지려고 하고 싫은 것은 밀치고하는 이런 마음들이 전부다 그 근원이 아뢰야식에 있는데, 주관, 객관으로 나눠져서 주관이 객관을 인식함으로서 일어난다 이런 얘깁니다. 중생의 아뢰야도 이와 같아서 모든 색상 더불어 함께 한다네 존재하는 일체 세간 모든 모습들 이들을 취하여서 있다고 하네. ‘중생의 아뢰야도 이와 같아서 모든 색상 더불어 함께 한다네’ 하는 것은 모든 색상은 바깥에 있죠? 그러니까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지는 거고. ‘존재하는 일체 세간 모든 모습들 이들을 취하여서 있다고 하네.’ 눈으로 보이는 모양과 색깔도 전부 아뢰야식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도 아뢰야식의 일부분이고, 바깥에 보이는 것도 아뢰야식에 일부분이다, 이런 거예요. 이 게 참 알기 어렵죠. 만져지기도 하고 모양도 있고 색깔도 있는데 이게 왜 아뢰야식이라 하느냐. 지난 시간에 많이 얘기 했는데 다시 얘기하면, 모양과 색깔이라는 것도 불빛만 조금 달라져도 그 색깔이 안 나옵니다. 책상도 딱딱하다 하는데 그것은 감각이에요. 책상이 딱딱한 것이 아니고 감각이 딱딱한 거예요. 또 두께가 두껍게 보인다 하는 것은 자기의 시각 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죠. 그것이 사람마다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곤충 차원에서 보면 두께가 또 다른 거예요. 이것이 전부 아뢰야식이 나타난 것이라는 거죠. 왜그러냐 하면, 모양, 색깔, 두께 이런 것들이 감각을 통해서 나타나는 거고, 이 감각이 마음이라는 거죠. 이런 마음이 바깥으로 투영되어서 모양과 색깔을 띠고 나타난 것을 우리는 내밖에 따로 독립된 개체가 있는 것 같이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게 알고 보면 사실은 자기 마음이 바깥으로 투영되어서 나타난 것인 줄도 모르고. 깨달음을 잘못 알아 미혹하여서 나를 세워 나의 것을 생각하나니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이 자재하게 세간을 지어낸다네. 누가 세간을 지어내느냐? 아뢰야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화엄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흙, 물, 불, 바람 4대 원소라고 하는 물감을 가지고 마음이라는 화가가 캠퍼스에 그림을 그린다. 오온도 만들고 일체 모든 세간, 우주 삼라만상도 만들어 낸다, 그려낸다, 이랬습니다. 그게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말인데 여기에서 하는 게 그런 얘깁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마음에 그렇게 와 닿는 거 없죠, 그죠? 다 압니다. ㅎㅎㅎ 자! 손을 깎지 한번 껴 보세요. 손가락을 제쳐 보세요. 손가락이 아픈 거 맞아요? “마음이 아퍼요.” 마음이 아프다? 아! 이제 공부가 좀 됐네. ㅎㅎㅎ 그래서 이렇게 하면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는데 아픔은 착각이에요. 이게 마음이거든요. 물질은 아는 성질이 없습니다. 아프다, 가늘다, 딱딱하다, 얇다, 두껍다, 이런 것들은 전부다 앎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입니다. 『금강경』에도 나오죠. ‘내가 말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다. 세계라고 하지만 이름이 세계일뿐이지 진짜 세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내가 말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세계라고 대상을 인식하니까 세계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세계라고 인식하지 않으면 세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시계도 내가 시계라고 인식하니까 시계가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시계라는 인식이 없다면 시계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밖에 시계가 있으니까 시계라 한다, 산이 있으니까 산이라 한다, 세계가 있으니까 세계라고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틀렸다는 말입니다. 바꿔야 됩니다. 내가 인식을 하니까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대상을 인식하지 않으면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많은 오류를 범하는 중에서 이런 걸 범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이 세상은 존재한다.’ 맞습니까? 자기가 없어도 이 세상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아무도 없네. 망신 당할까봐서 손 안 드네요. ㅎㅎㅎ 손은 안 들지만 마음속으로 ‘그래도 내가 없지만 존재하죠’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가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대상이 있는데,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 세계가 존재한다면 모순이잖아요. 그러면 인식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마음에 의해서 존재하는데 내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은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만약에 진짜 존재할 것 같으면 변하지 말아야 되거든요. 두 번째는 관계를 떠나서 독립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대상을 인식을 해서 인식되는 대상이라면 관계 속에서 독립되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독립돼 있지 않죠. 내가 대상을 인식하면 내 밖에 따로 있다고 하지만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상 그와 나하고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이렇게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닌 겁니다. 변하는 겁니다. 이 몸도 보이지만 변해가잖아요. 독립 된 것이라면 인식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여기 시계라든지 찻잔이라든지 따로 독립되어 있다면 우리가 파악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파악이 안 되죠. 이것이 시계다, 찻잔이다, 이것은 나하고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파악 되는데 정말 독립돼 있다면 인식 불가능입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죠. 그렇다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세계는 한 순간도 우리와 분리 되어 있지 않고 같이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일체 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아뢰야식 변화하여 나타나지만 바탕의 성품은 항상 깊어서 지혜 없는 사람에게 일러 주어도 모두가 깨달아서 알 수가 없네. 아뢰야라는 마음이 이 이치가 너무 깊어가지고 지혜 없는 사람은 아무리 일러 줘도 모른다는 거죠. 여러분들도 제 이야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고 이해 안 되는 사람은 아! 내가 아직은 어리석구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ㅎㅎㅎ 그래서 이렇게 보이는 세계는 전부 아뢰야식이 나타나는 세계다 이런 얘깁니다. 항상 마음이 밖으로 투영되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얘기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시계라든지 찻잔에 대해서도 밖에 있느냐 없느냐. 그러면 ‘아! 그게 마음이구나.’ 아시게 될 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해보면 자기 몸은 있다고 굳게 믿었는데 변하고, 형상이 있다가도 사리지고, 몸이 텅 비어버리고, 분명히 있었는데 사라져 버린 거예요. 그러면 있다는 생각이 깨져버리죠. 마찬가지로 찻잔이 있다고 했는데 탁 깨져버리니까 없어져 버리잖아요. 이렇게 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찻잔이든 몸이든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변하는 것이고 변하는 것은 독립되어 있지 않은 거죠. 그래서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있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비유하여 능력 있는 요술장이가 거짓으로 여러 가지 짐승 만드니 가기도 하면서 뛰기도 하여 살아 있는 동물이나 실재 아니다. 요술쟁이들이 만든 것은 가기도 하고 뛰기도 하지만 실재가 아니다 이거죠. 중생의 아뢰야도 이와 같아서 거짓으로 일체 세간 만들어내니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유정들 바탕의 성품이 진실 아니다. 여기 보이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고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없어지는데,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죠. 여기 번역에 ‘바탕의 성품이 진실 아니다.’ 했는데 원문에 ‘체성무진실(體性無眞實)’, 없을 무(無)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실이 없다.’ 로 번역해야 맞을 거 같습니다. ‘아니다’하는 것은 이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진실이 따로 있다 이런 뉘앙스가 있죠. 그렇지만 ‘바탕의 성품은 진실은 없다’ 이렇게 하면 바탕은 진실한 것이라는 것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없다 하는 게 맞겠죠? 범부는 어리석어 알지 못하여 허망하게 분별하여 집착을 내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생각 일으켜 있다 없다 다르게 분별하다가 범천이나 장부라는 견해를 낸다. 범천(梵天)은 진여(眞如)고, 장부(丈夫)는 윤회 주체인 자아(自我)를 얘기하는 겁니다. ‘범천이나 장부라는 견해를 낸다.’ 이 말은 내 밖에 따로 뭐가 있다, 내 안에 뭐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신(神)이라고 보기도 하고 자아(自我)라고 보기도 하는데 아뢰야식은 범천도 아니고 장부도 아니라는 걸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는 쉬운 얘기를 했습니다. 이제 조금 깊이 들어가서 어려운 얘기를 하죠. 허망하게 분별을 해서 집착을 낸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유식(唯識) 삼성(三性)에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중심이 되어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있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있습니다.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변계소집성을 얘기 합니다. 변계소집성이라는 것은 ‘두루 헤아려서 집착하는 성품’이라는 겁니다. 무엇을 집착하느냐 하면 상(想), 보이는 세계를 집착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새끼를 뱀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마치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여기 책상도 매 순간순간 변하는데 모양과 색깔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서 마치 있는 것으로 볼 뿐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모양과 색깔은 전부다 허상을 보고 있는 거예요. 진실은 변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과학에서는 파장의 세계, 매 순간 파장의 세계는 한 번도 멈춰진 적이 없고 계속 변하는데, 그 변하는 것에 우리가 모양과 색깔 입혀서 그렇게 보고 있다고 과학에서도 그렇게 얘기 하고 있어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다 허상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대로의 모양과 색깔은 없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물을 고정되게 보는 것은 왜 그러냐. 이게 문제에요. 우리가 그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사물을 고정되게 보고 있으니까 상(想)으로 보이는 겁니다. 상으로 보이니까 자꾸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새끼를 뱀으로 보는 사람은 계속 뱀이 존재하는 거예요. 사실이 아닌데 그렇게 보이도록 입힌 마음이 바로 아뢰야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모양과 색깔을 입히는 이 아뢰야식이 정화가 되어서 자성청정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원성실성(圓成實性), 진여입니다. 진여의 세계는 실체가 없는 비어있는 세계에요. 그래서 관계를 갖고 있는 관계성의 세곕니다.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늘 변하는 세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