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에 대한 게송 (강의 - 6)
이와 같이 중생의 아뢰야식은
생사의 흐름 속에 들어가 있어
육도의 윤회 속에 오고 가는데
참 나가 아니면서 나인 듯하다.
여기서 ‘참’자를 빼야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인데
참 나라하면 진짜 있는 것 같이 헷갈리게 됩니다.
한문에 보면 ‘비아이사아(非我而似我)’,
사(似)라는 말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실제 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이 나타난다 이 말이죠.
자아가 아닌데 자아로 둔갑해서 나타난다.
이게 말나식입니다.
이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보고 아(我)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해석하면
‘나가 아니면서 나인 것처럼 나타난다.’
이렇게 번역하는 게 좋겠어요.
‘생사의 흐름 속에 들어가 있어’라는 말은
삶과 죽음이란 얘기죠.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거거든요.
세상도 마음이고 몸뚱아리도 마음이라 했죠?
이 몸뚱아리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기도 하잖아요.
그럼 눈에 보이는 사물은 어때요?
모양이 있는 것은 부서져 없어지죠.
다시 또 생겨서 만들어지죠?
이처럼 형상이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을 되풀이 하는 거죠.
그래서 만든 것은 다 무상하다, 제행무상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육도의 윤회 속에 오고 가는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이 육도를 계속 오고간다 이 말이죠.
지옥은 누가 만든 거죠?
마음, 자기가 만든 겁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지옥의 세계가 보이는 겁니다.
지옥불은 쇳덩이고 돌덩이고 집어넣으면 다 녹아버릴 정도로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 녹아버린 불길 속에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고 반복하는 것이 지옥 중생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
혹시 여러분들 바위나 돌을 먹는 사람 봤지요?
우리나라 사람인데 쇠를 먹는 사람도 있데요.
그 사람 소원이 비행기 한 대 먹는 게 소원이랍니다.
자전거 한 대면 세끼를 먹는데요.
그렇게 단단한 것도 위 속에 들어가면 녹아버립니다.
그런데 태양은 녹습니까?
안 녹죠.
마찬가지예요, 태양은 녹지 않듯이
지옥불속에서는 다 녹아 버리지만
업으로, 업력에 의해서 나타난 것은
그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안 죽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축생은,
어리석으면 축생이 됩니다.
폭력과 식욕만 있는 게 축생인데
내내 주색잡기나 하고 어리석으면 소, 말, 돼지가 되는 거예요.
요즘으로 말하면, 소로 태어나도 미국에서 태어나가지고 고기를 제공하고
그 고기를 우리가 먹는 거예요.
먹은 사람은 또 소가 되고.
무시무시하죠?
먹지마세요.
그 다음에 아귀는 탐욕이 많고 아수라는 질투심이 많아요.
인간은 자아관념이 강합니다.
이 자아관념이 별로 없으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 여섯 갈래로 윤회하는 것은 전부다 마음입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표류물들이
생각없이 물결따라 흘러 가듯이
아뢰야도 결정된 분별이 없이
중생 몸을 따라서 움직여 간다.
아뢰야식이라는 것은
결정되어 있지를 않아요.
선이다, 악이다 그런 게 아니고 백지와 같은데
‘중생의 몸을 따라서 움직여 간다.’
이 말은 업에 걸린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두 마리 코끼리가 싸움하다가
부상당한 코끼리는 물러나듯이
중생의 아뢰야도 이와 같아서
염법이 끊어지면 흐름이 없다.
이게 참 중요한 부분이죠.
아뢰야라는 것이 결정된 분별이 없기 때문에 중생 따라 움직이지만,
염법이란 말은 물들어 있는 마음(법)이죠.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원인과 조건을 발생하기 때문에 전부다 법입니다.
물들어 있다 하는 것은 바로 번뇌에 의해서 물들어 있는 걸 얘기하죠.
화를 낸다든지, 욕심을 부린다든지, 증오심을 낸다든지,
남을 의심 한다든지, 원만한 마음을 낸다든지,
삿된 견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든지
이런 것은 전부다 염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게 탁 끊어져버리면 흐름이 없는 거예요.
흐름이라는 것은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이걸 얘기하거든요.
염법이 무슨 법인지 얘기를 해보죠.
아뢰야식이 있고, 아뢰야식에 종자에서 나온 말나식이 있고,
그 다음에 의식이 있고,
그 다음에 전오식(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 있습니다.
아뢰야식 종자에서 나온 말나식은 잠재되어 있는 자아의식입니다.
아뢰야식에 수많은 종자가 있는데
이 종자가 발현해서 나타나는 게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입니다.
말 그대로 종자는 씨앗이죠.
아뢰야식에 저장된 씨앗, 요즘말로 하면 정보입니다.
종자생현행, 종자가 현행을 한다.
현행이란 말은 나타나서 움직였다 이 말이죠.
나타나서 움직였다는 말은 정보가 모습을 드러낸 거죠.
이런 정보는 말나식은 잠재의식이기 때문에 표가 안 나고
특히 의식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전오식은 의식과 같이 동시에 작용을 하죠.
그래서 나타나는 동시에 다시 아뢰야식에 저장됩니다.
이것을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고 합니다.
현행, 나타난 것이 종자에 훈(熏), 영향을 끼쳤다 이런 말이죠.
정보가 나타난 동시에 다시 아뢰야식에 종자로서 저장이 됩니다.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는 동시적인 관계예요.
쉽게 말하면,
제가 말하는 동시에, 말을 하는 것은 정보가 튀어나와서 하는 것이지만
그 말하는 것을 귀로 들으니까 동시에 저장이 되는 겁니다.
현행과 동시에 씨앗으로 저장되는 것이죠.
이게 동시성이에요.
나타나는 것[현행]과 씨앗 심는 것[훈종자]은 똑같다는 거죠.
그래서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는 똑같은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종자생현행이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은 현행훈종잡니다.
이게 동시에 일어난다는 거죠.
이해되십니까?
예를 들어 말하면,
학교 선생님들이 강의를 준비를 하는데
강의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대충 정리해서 강의를 하는데
강의 전에는 정리가 안 되었다가
강의 중에 말을 하면서 머릿속에 정리가 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말한 것을 상대도 듣지만
자기도 듣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 말을 들으면서 저장이 되는 거예요.
저장 된 정보는 대중한테 얘기하고,
얘기 하는 동시에 내 귀로 듣기 때문에 마음에 저장이 되고,
이렇게 드러나는 것하고 씨앗으로 심어지는 게 동시에 일어난다는 거죠.
그런 것을 잘 표현한 것이 『천수경』 첫 머리에 나옵니다.
‘수리수리 마하 수리 수수리 사바하’ 이게 정구업진언인데
구업(口業)을 맑히는, 입으로 짓는 죄업을 맑히는 참다운 말이죠.
내가 남을 욕을 했다, 나쁜 생각을 했다, 이러면
구업을 지었으니 참회해야 되겠다 해서
혼자서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 수리 수수리 사바하’
이렇게 하면 자기 구업이 깨끗해집니까?
깨끗해지긴 하겠지만 힘이 약해요.
그럼 어떻게 자기 구업을 맑히는 게 좋냐 하면,
‘수리수리 마하 수리 수수리 사바하’라는 뜻이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자’ 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면
욕을 하고 나쁜 생각 했던 것이 지워진다는 거예요.
그게 정구업진언입니다.
아이들도 보면 습관적으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있어요.
이런 아이들한테 잘 가르쳐서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게 하면
욕하는 게 없어져 버려요.
어째서 그런가 하면,
욕을 하게 되면 욕하는 동시에 자기가 듣기 때문에 종자로 마음속에 저장되고
다시 그 종자가 발현되어서 또 욕을 하고 반복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칭찬하면, 칭찬하면서 내 귀로 듣기 때문에
그 칭찬하는 게 마음에 저장되고,
그렇게 되면 계속 칭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끗이 정화가 되는 거예요.
원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 염법이,
마치 욕을 하게 되면 욕을 되풀이 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이죠.
그것이 욕하는 동시에 내 마음에 저장되기 때문에.
그럼 이런 것을 탁 끊어버리는 게 좋지 않아요?
안 그래요?
끊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 이 둘과의 관계는 동시에 일어난다.
비유를 들면, 얇은 종이에 먹물을 떨어뜨리면
먹물이 보이는 동시에 종이에 먹물이 배이죠.
그 종이를 움켜쥐면 먹물이 손에 묻는 겁니다.
그래서 먹물이 묻으면 드러남과 동시에 배인다는 거죠.
이처럼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말이나 행동함과 동시에 말하는 내용이나 동작이 동시에 저장이 되는 겁니다.
이게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고 동시에 생각이라는 종자가 심어지는 거죠.
모든 것은 그렇게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생각의 흐름이 있을 때 이것을 ‘육도 윤회를 한다’ 그럽니다.
불교에서는 극명하게 육도윤회의 얘기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보통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없다는 유물론자들이 있고,
사람의 영혼은 영혼불멸하다,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있다고 주장하는 두 가지가 있어요.
이 두 가지는 모두 삿된 견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으면 영혼불멸이라는 거죠.
영원히 죽지 않는다, 굉장히 달콤한 말인데,
놀라운 것은 지옥과 천국이 불멸이다, 안 바뀐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천국에서, 지옥에 가면 지옥에서
영원히 거기서 살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이게 두려운 거예요.
그렇게 지옥가고 천국가는 것은 누가 선택하느냐?
하나님이 선택한다는 거죠.
악한 짓을 하다가도 하나님한테 잘 보이면 선택되어서 천국가고
선택이 안 되면 지옥가고, 한 번 지옥가면 못 나오는 거예요.
결정 되어 있어요.
이게 기독교인들이 가장 두렵게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동물들은 영혼이 없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동물들은 영혼이 없다하니까
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동물이 개인데
개가 죽고 난 뒤에도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고 개에게는 없다하니까
이게 불만 인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죽으면 끝난다는 생각은 유물론자들의 생각인데,
이게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면,
개는 영혼이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거죠.
왜냐하면, 인간도 동물의 한 부분인데 인간이 영혼이 없다면
개도 없다는 말이고 죽으면 그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두 가지 견해를 불교에서는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것은 절대주의라 보고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다는 것은 허무주의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견해는 이런 난점이 있어요.
절대주의자는 윤회를 부정하니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니까...
5세 미만의 아이들을 보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버클리 대학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전 세계에 전생을 체험한 사람들을 기록한 책이 나왔어요.
그러면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고
지옥 가거나 천국 가거나 둘 중에 하나로 결정 되어 있는 그 세계를 얘기 했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기독교는 증명 못합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송광사에 있을 때
어떤 할머니가 찾아와서 자기 손녀딸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손녀딸이 5살 무렵에 자기 또래아이들과 놀면서
‘야! 나는 전생이 이래저래 살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살았니?’
할머니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니 이 아이는 전생을 다 기억하는 겁니다.
그 뒤로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놀아라 하면서 신주 모시듯이 한 거예요.
그 아이 부모는 이혼해서 같이 안 살고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사는 거죠.
손녀딸이 나이가 한 20살쯤 되어서 하는 말이
“다른 것은 다 해봤는데 하나 안 해본 게 있습니다.”해서
“뭐냐?” 물으니까
“출가 할랍니다.”
그래서 출가를 했어요.
그렇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94년도인가 95년도에
동학사 강원에서 강의를 해 달라 해서 갔습니다.
강의 중에 이 이야기를 하고 처소에 들어가는데
사미니가 따라오면서 하는 말이 “스님,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이러는 겁니다.
장본인을 제가 만났어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 할머니 말이 사실인거예요.
윤회라는 게 이런 것인데 어떻게 설명을 해주느냐,
곤란하죠.
그 다음에
죽으면 영혼이 없다,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허무주의도
자기가 태어나는 이유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죽으면 그 뿐이라면 지구상에 인간이 한 명도 남지 말아야 되는데
아이들 계속 태어나잖아요.
그래서 절대주의 와 허무주의는 아니다 이거죠.
하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잖아요.
그런데 이 윤회라는 말은 알고 보면 고통의 세계고,
모두가 착각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다 이 말이죠.
불교에서는 영혼불멸도 얘기하지 않고 그렇다고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럼 윤회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래서 상속식(相續識)이라는 말을 씁니다.
마음[識]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듯이 상속한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면
앞에 일어나는 생각과 뒤에 일어나는 생각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를 외운다면
계속 똑같이 외우면 생각이 계속 면면상속을 하는 겁니다.
생각 생각이 이어져가지고 결국 외우게 됩니다.
앞에 사라진 생각이 뒷생각을 이끌어내는 거죠.
그 생각이 또 뒷생각을 이끌어내고,
이것을 상속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으니 유(有)가 아니고
상속하기 때문에 무(無)도 아니다.
이런 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윤회라는 거죠.
이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탁~ 끊어버려야 됩니다.
어느 보살님이 얘기하듯이
화가 나니까 5,6일 지속되더라고 말씀하시던데,
‘화’는 염법이잖아요.
‘화’라는 감정이 상속하는 거죠.
여러분, 마음은 대상 따라 순간순간 변하지만
그것이 강한 충격이나 자극이 올 때는 그 감정이 끊어지죠.
이게 뭐죠? 휴지죠.
이건 뭡니까? 보드마카죠.
휴지를 볼 때는 보드마카를 잊어버리고
보드마카를 인식할 때는 휴지대한 인식을 잊어버리죠.
인식이 대상 따라 팍팍팍 바뀌어요.
그렇지만 강한 충격이 오는 것은 오래갑니다.
백화점에 물건이 사고 싶은 게 있는데 돈이 없어 못 샀다면 어떻게 됩니까.
버스나 택시 타고 오면서도 그 물건 생각이 면면상속하는 거예요.
대상 따라 순간순간 마음이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상속하는 마음이 거기 가 있는 거죠.
이렇게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을
불교에서는 카르마(karma), 업(業)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이런 면면상속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반복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탁 끊어버리려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상속하는 마음을 끊어버리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죠.
한 생각이 탁 일어나면 그 한 생각이 삶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고, 현재 이 순간만 있어요.
인생 50, 60년을 살았다 해도 그 인생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 탁 일어나는 한 생각이 삶에 전부라는 거죠.
그런데 그 한 생각이 건전하고 깨끗하면 좋지만
불건전하고 부정적인 생각, 감정적인 생각을 하면
자기 삶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생각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금강경』의 첫머리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떻게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이 질문을 하잖아요.
한 생각 일어나는 게 생(生)이고
한 생각 사라지는 게 사(死)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생사다.
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생각이 자기 삶의 전부이기 때문에.
딱 맞잖아요.
『원각경』「보안보살장」에 보면
적멸차제(寂滅次第) 다섯 단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차제는 차례를 얘기하죠.
첫 번째 단계는 지수화풍 4대가 어우러져서 생긴 몸 소멸이고
두 번째는 마음 소멸입니다.
세 번째는 경계 소멸이고
네 번째는 소멸했다는 생각 소멸입니다.
다섯 번째는 비환불멸(非幻不滅), 환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
첫 번째 몸 소멸했다,
소멸이란 말을 잘 알아야 됩니다.
뭐가 소멸했느냐?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은 다 소멸합니다.
그런 것을 환(幻), 실제 하지 않는 것이라 하고
다른 말로 착각이라 합니다.
착각은 다 없어진다.
몸은 있다고 하지만 몸은 개념에 지나지 않고 인체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은 단일체로 생각하지만 그런 거 없습니다.
『사념처경』에 보면
백정이 소를 가지고 와서 잡습니다.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가죽은 가죽대로 잡아가지고
상위에 올려놓고 판매를 합니다.
무엇을 팝니까?
소를 팝니까, 고기를 팝니까? 고기를 팔죠.
사람들이 사러 와서 ‘고기 한 근 주쇼’, 이러지 ‘소 주쇼’ 안하거든요.
그럼 소는 어디 갔습니까?
이처럼 소를 다 분해 보면 소라는 것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몸도 흙, 물, 불, 바람, 허공 5대의 원소로 이루어졌다 이거죠.
흙은 뼈, 피부, 장기, 손톱, 발톱, 머리카락 이런 게 20여 가지 되고
물의 요소는 침, 소변, 혈액 체액이죠.
불의 요소는 체온, 바람의 요소는 말하고 움직이는 기운,
허공의 요소는 비어있는 부분이죠.
이렇게 5대가 합쳐서 몸이라 이름을 부를 뿐이지
하나하나 분해해 보면 몸이라 하는 것은 없는 겁니다.
실제로 수행해 보면 몸이 사라져서 허공처럼 텅 비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보이고 느끼고 바뀌는 것은 전부다 환이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 다음에 마음 소멸은
몸 기운에 의해서 마음이 형성된다는 거죠.
흙의 요소는 부드럽고 딱딱한 건데
몸이 긴장되어서 딱딱해지면 마음도 딱딱해지는 겁니다.
그게 고집, 자만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몸에 냉기가 많고 성격도 차갑습니다.
냉기는 불의 요솝니다.
사람을 대해도 냉랭하고 차갑게 대합니다.
몸 기운에 의해서 마음이 그 영향을 받아서 작용을 하는 거죠.
그래서 몸 기운에 의해서 심리가 형성 되는 게 마음이에요.
이 마음은 각자 마음입니다.
그러면 몸 기운이 형성 된 마음도 소멸하는 거죠.
그게 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 여섯 가집니다.
여기서 탐욕[貪]은 불의 요소에서 옵니다.
불길이 왕성한 사람은 욕심이 많아요.
그러니까 탐욕은 딱 생기면 몸과 마음을 부리는 거예요.
그거(백화점 물건) 안 사면 안 되고 안 가지면 안 되는 거죠.
탐욕이 자기 몸과 마음을 자기 맘대로 굴리는 거예요.
분노[瞋],
화가 나면 화난 표정 화난 행위가 그대로 나옵니다.
그 화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따라가는 거예요.
자기도 다치고 다른 사람도 다치고...
그러니 번뇌가 자기를 부린다는 거죠.
치(癡), 어리석음도 마찬가지에요.
어리석음은 탐욕과 성냄처럼 잘 나타나지가 않아요.
표가 안 납니다.
자신도 모르게 생명을 죽이고 술과 마약을 하고,
이런 것들이 전부 어리석음이에요.
그게 나쁜 것인 줄 모르는 거예요.
안다 해도 계속 하는 거죠.
만(慢)이라는 것은 교만인데,
요즘 사회가 학력위조로 떠들썩하죠.
그러다가 양심 고백을 하죠.
특히 유명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학력이 내(자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어디 나왔는데...’ 하는 이게 교만입니다.
나는 어디 나오고 회사는 어디 다니고 우리 집안은 이렇고..
이렇게 될 때 그 교만이 자기 몸과 마음을 부리는 거예요.
의심[疑]도 마찬가집니다.
스승이 제자를, 제자가 스승을 의심하고 이런 것은 덜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는 것은 골치 아픕니다.
이런 의심이 자기의 몸과 마음을 버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견(見)은 삿된 견핸데
삿된 견해 중에서 아견(我見), 이놈이 가장 강력합니다.
‘내’라 하는 견해, 이것이 있어서 의심도 하고 교만도 부리고
어리석기도 하고 화도 내고 욕심도 부리고 이러는 겁니다.
이런 게 전부다 몸 기운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보이는 것들이거든요.
이렇게 감정, 생각, 몸뚱아리같이 보이는 것은
취하지 마라, 없어지는 것들이다, 진짜 아니다 이거죠.
그 다음에 자아의식[말나식]인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 네 가지가 소멸합니다.
이게 소멸하면 마음에 의해서 경계, 인식대상이 나타나는데
이것도 가짜니까 소멸합니다.
마음에 의해서 나타난 다는 말은 많이 했는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휴지죠?
첫 느낌이 어때요?
하얗죠? 뽀송뽀송해요?
그런데 휴지한테 “휴지야 너 하야니?” 물어보면
“아니 내가 언제 하얗다고 말해달라고 한적 있나?”
“휴지야 너 뽀송뽀송하니?”
“언제 내가 뽀송뽀송하다고 말해달라고 한적 있나?”
이렇게 되물을 거예요.
실제는 말이 없는데 우리가 하얗다, 뽀송뽀송하다 이랬죠.
이것은 내 생각을 휴지에다가 덧붙여서 보는 겁니다.
결국 휴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휴지라고 이름을 붙여서
그렇게 부르자고 약속했을 뿐인데
진짜 휴지가 있는 것 같이 착각을 하는 거예요.
그게 경곕니다.
그래서 이런 경계는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소멸하면 경계도 소멸하는 겁니다.
이렇게 일어남과 사라짐이 반복하는 객관화 된 것은 다 소멸합니다.
다섯 번째가 비환불멸(非幻不滅), 환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
이게 원각(圓覺)이라고 합니다.
불생불멸이니까 니르바나, 열반입니다.
이게 적멸인데 적멸 단계도 거친 것부터[몸 현상] 미세한 마음, 미세한 경계,
이런 것이 점점 소멸해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염법인 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 이 모두가 의식상에서 일어납니다.
이 의식이 부차적으로 일어나는 심리가 52개나 있는데
이런 심리도 없어지는 거예요.
다 가짜예요.
중요한 것은 생각을 객관적으로,
감정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훈련을 키워야 만이
염법의 흐름, 생각의 흐름을 탁 끊을 수 있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면 안 되는데
그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보는 작용과 대상 인식하는 마음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것을 휴지라고 인식하면
휴지라고 인식하는 정신작용과 휴지라는 대상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되요.
여러분 구분 됩니까? 안되죠?
분명한 자극이 안 오니까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구분이 되려면 그 정신작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것은 말로도 안 되는 거예요.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게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예요.
우리가 그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을 쓸 수만 있다면
모든 착각에서 벗어납니다.
있지도 안은걸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환(幻)은 착각이죠.
몸도 착각이고 마음도 착각이고 경계도 착각이고, 다 착각이에요.
그것은 마치 새끼를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착각한 사람은 그 뱀이 진짜 있다고 굳게 믿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그냥 새끼지요.
그와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남편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식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때요?
착각하지 마세요. ㅎㅎㅎ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겁니다.
그럼 없다고 봐야 되나?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없다?
아니죠. 틀렸습니다.
있다고도 보지 말고 없다고도 보지마라.
유식처럼 계속 변하는 겁니다.
고정되게 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실을 볼 수 없죠.
그러면 이것을 끊는 방법은 뭐냐.
끊는 방법을 얘기하려면 한정이 없는데,
기본적인 것은 바른 견해가 서야 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불법학습, 처음엔 들어야 됩니다[聞].
법을 들으면 지혜가 생긴다.
두 번째는 사유[思]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법을 들으면 사유를 해서 법을 가려내야 되요.
법이란 말은 현상을 얘기하는데
원인과 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을 법이라고 전 시간에도 얘기 했죠.
쉽게 말하면, 남녀가 결혼하면 아이가 생기죠.
여기서 남녀는 원인과 조건이고 아이는 법입니다.
원인과 조건이 맞으면 생기는 겁니다.
콩을 심으면, 콩은 원인이고
흙, 물, 불, 바람은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원인과 조건이 맞았을 때 콩이 싹을 틔우죠.
그런데 싹을 틔우면 콩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콩이 없죠.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원인과 조건이 만나면 그 원인이라는 게 모습을 바꾸는 거예요.
그 말은 뭡니까, 실체가 없다는 말이죠.
원인도 실체가 없고 조건도 실체가 없는 거예요.
그래야만 싹이 트는 거예요.
만일에 콩이 콩으로 고집을 계속 부리면
뿌리가 생기고 싹이 틀리가 없겠죠.
콩이 뿌리로 바뀌어야 만이 싹이 트잖아요.
뿌리로 어떻게 바뀌느냐?
직접원인과 간접조건이 만나게 되면 새로운 사실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게 법[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잘 가려내는 것을 색법각지라고 그럽니다.
바로 지혜로 가는 길이예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수행[修], 닦아야 된다.
직접 법문을 듣고 사유를 했으면
몸과 마음을 직접 만든 게 아닌데 확인을 하자,
확인을 해보니까
아! 진짜 일어나고 사라짐 밖에 없구나,
일어나고 사라짐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는구나,
그러면 여기는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구나,
이렇게 확실히 보는 거예요.
여기서 알아가는 방법 중에서 정념(正念)이라는 게 있습니다.
변행심소(遍行心所)인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라는 심리가 있습니다.
촉은 접촉이고 접촉하게 되면 감각이 일어나요.
감각이 일어나면 받아들이는 것이 이미지화 됩니다.
그 다음에 생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책상을 접촉하면 딱딱한 느낌이 오죠.
그 딱딱한 것을 캐치를 합니다.
접촉에서 오는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낙(樂), 고(苦), 사(捨)가 있는데
낙은 즐거움, 고는 괴로움, 사는 무덤덤이죠.
그렇다면 딱딱한 것은 무덤덤한 것에 속하죠.
그런데 힘껏 쥐면 아프죠?
그럼 괴롭다는, 즐겁지 않다는 고에 속합니다.
이렇게 접촉이 일어나면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는 동시에 감각이 생깁니다,
즐거움은 ‘바램’이라 집착이 오고, 집착이 오면 업(業)을 지어요.
업을 유(有)라 하고, 있음[有]이 있으면 생(生), 다시 태어나요.
태어나면 늙고[老] 병들고[病] 죽음[死]이에요.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끝나야 되는데
지나치면 쾌락으로 가고 이게 심하면 갈애(渴愛)가 되는 겁니다.
그리되면 취(取), 집착이 오는 거예요.
이 집착으로 인해 업을 짓게 되고 이어서 행위가 나옵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이 나오죠.
그렇게 되면 그것이 마음에 선악의 업이 저장되어
다음 생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죠.
간단하게 얘기하면
즐거움은 즐거움에서 끝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안 좋은 느낌은 안 좋은 느낌에서 끝나야 되지
그것에 감정, 생각을 덧붙여서 양념 치면 안 되는 겁니다.
양념을 치면,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바로 간다 이거예요.
무덤덤한 것은 내버려두면 무명으로 갑니다.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로 가잖아요.
무명으로 바로 연결되는 거죠.
중요한 것은 이 감각을 자기가 얼마만큼 잘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원효스님께서도 몸, 감각, 마음, 마음의 현상,
네 가지를 관찰해야 된다고 분병하게 말씀 하셨어요.
이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 하는데
원효스님께서는 「중변분별논소(中邊分別論疏)」에 보면
몸은 ‘내가’ ‘내 것이다’라고 하는데 잘 관찰해봐라 정말 몸이 ‘내’고 ‘내 것’인지,
감각은 내가 있어서 모든 감각을 받아들인다 하는데
그런 감각에 정말 ‘내’라 하는 게 있는지 살펴봐라.
마음, ‘내’라 하는 게 마음상태인데, 정말 내가 있는지 살펴봐라.
마음의 현상, 마음의 현상에는 전부 내가 작용한다 하는데
정말 마음 작용하는데 내가 있는지 살펴봐라 이거예요.
그런 게 없다는 거죠.
그 중에서 감각이 아주 중요하다,
감각이 윤회의 원인이다 하고 원효스님께서 말씀을 하셨어요.
이것을 탁 탁 끊는 게 정념(正念)이에요.
정념은 ‘알아차림’인데
대상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캐치한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일어나고 사라짐의 반복 밖에 없다.
이것을 무상이라 합니다.
학자들도 세속에 진리를 패러다임이라 하는데
패러다임은 순간순간 바뀝니다.
그런데 바뀌지 않는 패러다임이 있어요.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패러다임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진리다.
변한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이다.
몸도 일어나고 사라짐을 반복하고
정신 현상도 일어나고 사라짐을 반복합니다.
크게 이야기 하면 거시적인 세계, 이 우주도
일어나고 사라짐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어요.
일어나고 사라짐이라는 것은 다만 현상만 있을 뿐이지
그 바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없는 것을 공(空)이라 그럽니다.
일어나고 사라짐 속에서 조금 더 들어간 것이 공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현재 있는 것도 자세히 관찰하니까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더라.
반야심경에 나오죠?
일어나고 사라짐도 없고, 더럽고 깨끗한 것도 없고,
늘어나고 줄어듦도 없다는 말이죠.
다시 또 자세히 관찰에 들어가니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아무것도 없더라 그거죠.
그런데 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 공(空)이고
공은 물질적인 현상, 정신적인 현상과 같은 겁니다.
참으로 희한하죠.
이렇게 했을 때 염법이 끊어져 버립니다.
이런 이야기는 뒤에 자세하게 이야기해 놨습니다.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우리가 깨달음에 들어가려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잘 봐야 됩니다.
이런 무상을 잘 관찰해야 만이 공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공은 무(無)가 아닙니다.
공 가운데 무(無)를 얘기를 하지 공 자체가 무(無)가 아니라는 겁니다.
공은 결여되어 있는 모습을 공이라 하고
우리의 상호관계 속에 들어 있는 이게 공의 모습이에요.
관계 또는 개체가 비어 있는 거고, 실체가 없는 것을 공이라 합니다.
그래서 현상계 자체가 비어있다는 것이지
현상계가 무(無)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것을 착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서 ‘염법이 끊어지면 흐름이 없다.’ 이랬습니다.
그래서 끊는 방법에는 정념(正念:알아차림)을 통해서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마타는 그칠 지(止)자, 생각의 흐름이 딱 그쳐지는 겁니다.
이 생각의 흐름이 그쳐지면 안정이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계속 지켜보게 되면
인식이 끊어져 버립니다.
분명히 인식하기는 인식하는데
일정한 모양이나 색깔이 있는 인식 대상이 없으니까
인식이 끊어져 버리는 겁니다.
이런 것을 선가(禪家)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 그럽니다.
이런 경지에 오면,
보면 보는 것만 있고 들으면 듣는 것만 있는 경지에 들어가는 거죠.
판단 중지가 되어 있는 상태예요.
그게 선정입니다.
그래서 ‘아! 실체도 없고 자아도 분명히 없구나’,
이렇게 지혜가 계발되는 거예요.
이때부터는 사물을 봐도 대상을 있다 보는 게 아니에요.
대상이 없다고도 보지 않고, 마음도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보디사트바(bodhisattva, 菩薩)는 『반야경』에서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면 보는 것만 있고 들으면 듣는 것만 있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게 되는 거죠.
이런 경지에 오게 되면 완전하게 자유로워지고
후생을 바꾸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 때는 중생 구제하고 싶은 마음에 오고, 또 인연이 다하면 가고,
오고 감이 자유로운 거예요.
그래서 이때가 되면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
이것이 탁 끊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비유하면 청정한 연꽃 같아서
진흙탕을 벗어나 청결하다네
하늘과 땅 모두가 수용하여서
모두 다 보배로서 공경한다네.
여기서 ‘진흙탕’은 번뇌망상을 얘기하죠.
염법이 끊어지게 되면 탐진치, 더러움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연꽃 한 송이가 피듯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중생의 아뢰야식이
습기의 진흙탕을 벗어난다면
조건이 바뀌어서 청정해지니
부처님 보살들이 소중히 하네.
조건이라는 것은 전의(轉依), 의식처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원문에는 전의득청정(轉依得淸淨)이라 했어요.
그러니까 아뢰야식이라는 바탕이 청정으로 바뀌었다 이말 입니다.
유식(唯識)은 삼성(三性)이 있어요.
의타기성(依他起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있는데
중심이 되는 것이 의타기성이에요.
의타기성에는 염분의타(染分依他)와 정분의타(淨分依他)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의타기성을 식(識, 八種識)이라 하고 그 중에 근본 되는 것이 아뢰야식이에요.
전의(轉依)라는 말은 구를 전(轉)자, 의지할 의(依)자,
의식처가 바뀌었다는 말로 의타지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의타지성은 타(他)를 의지해서[依] 일어나는[起] 성품[性]이죠.
마음은 독립되어 일어나는 게 아니고 반드시 타(他)를 의지 합니다.
그럼 타(他)는 무엇이냐.
예를 들어서, 이게 뭐죠? 휴지죠?
그럼 휴지라는 인식은 휴지에 의해서 인식이 일어났죠?
휴지라고 인식하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은 휴지에 의지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휴지라는 인식은 독립되었다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거죠.
한 번 더해볼까요?
이게 뭐죠? 시계죠?
시계라 하는 마음은 시계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그게 의타기성입니다.
이게 시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얘기 했는데
우리의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도 혼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염분(染分)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얘기하는데 상을 얘기하고
정분(淨分)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얘기하는데 진여(眞如)를 얘기 한다.
그래서 의타기성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대상이 따로 있고 내가 있고,
이렇게 분리 시켜서 보는 것은 전부다 변계소집성이에요.
지가 지마음대로 헤아려서 있다 없다 분별하는 거예요.
있다 없다 분별하는 마음이
정념(알아차림), 사마타, 위빠사나 또는 화두를 들어서 탁 끊어져버리면
염분(染分)이 사라지고 의타기성이 바로 원성실성, 진여로 바뀌어버려요.
쉽게 말해서 새끼를 뱀으로 착각하는 것은 의타기성이 아니고 변계소집성이에요.
뱀이 없는 것을 지가 헤아려서 있다고 봤다 이거죠.
그래서 수행을 해보니까 뱀은 착각이고 이 본질은 새끼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거죠.
새끼가 무엇인지 그 본질적인 것을 꿰뚫어 봤을 때
의타기성의 정분(淨分)인 원성실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전의(轉依)가 일어납니다.
의타기성이 원성실성으로 바뀌었다하는 것은
아뢰야식이라는 바탕이 깨끗한 것으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조건이 바뀌어서 청정해지니’라는 말은
정확하게 얘기하면 아뢰야라는 의지처가
깨끗한 자성청정심으로 바뀌었다 이런 말입니다.
이렇게 바뀐 것은 ‘부처님 보살들이 소중히 하네.’
“야! 이제 됐다.
모두 자유로워졌다.” 하고 앉아 있죠.
비유하면 수승한 보배와 같아
천민들은 알지 못해 경멸하지만
임금의 왕관에 장식이 되면
만인의 왕 머리에 올려진다네.
‘천민들은 알지 못해 경멸하지만’
무지한 사람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경멸하고 그러는 겁니다.
‘임금의 왕관에 장식이 되면 만인의 왕 머리에 올려진다네.’
만인의 왕에 비유한 거죠.
모든 번뇌망상[만인]을 다스리는 왕 머리에 꽂아준다는 거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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