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에 대한 게송 (강의 - 4)
아뢰야라는 마음은 불가지(不可知)입니다.
너무 미세하기 때문에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아뢰야식을 알려면
8지 보살(八地菩薩:不動地)의 경지에 들어가야 만이
그때서야 아뢰야식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초지(初地)가 진여의 자리에 들어가지만
8지(八地)에 이르러야 만이 제8 아뢰야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초지가 성품을 봐서 진여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인데
초지에서 8지까지 거리가 상당히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는 얘기를 하면
처음 들어보는 분들은 굉장히 생소하게 생각을 합니다.
100년 전에 프로이드가 무의식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그것도 아뢰야식의 일부분을 겨우 초탈한 것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 아뢰야식은 3세기 때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 100년 전의 무의식 얘기를 했다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자, 읽어 볼께요.
비유하면 우유가 변화하여서
버터 되고 질이 좋은 치즈가 되듯
중생의 장식도 이와 같아서
많은 경계 비슷하게 변화해 낸다.
중생의 장식은 아뢰야식입니다.
눈이 보이는 이 세계는 모양과 색깔로 보이죠.
이게 아뢰야식이 나타난 거예요.
몸도 아뢰야식의 한 부분이지만
보이는 이 세계도 아뢰야식에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빛깔로 비슷하게 나타낼까.
거 참 궁금하잖아요.
뒤에 가면 나옵니다.
하나 알아둬야 될 것은
이 아뢰야식을 감출 장(藏)자 장식(藏識)이라고 하는데
장에는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이 있다고 했습니다.
갖가지 정보를 받아들이고 아뢰야식에 심고,
그 정보가 아뢰야식의 창고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거죠.
그런데 거기서만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종자가 다시 바깥으로 반연해 나타날 때가 있는데
이게 전부 다 아뢰야식이 만든 겁니다.
그래서 감출 장(藏)자는 창조에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창조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어요.
기독교의 창조주는 하나님인데, 불교의 창조주는 이 마음입니다.
이게 아뢰야식이죠.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언젠가 심리치료에 대한 토론회에서
목사님, 신부님들하고 스님들이 한 조가 되어서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심리치료니까 당연히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제가 겁도 없이 신부님, 목사님 앞에서
마음이 이렇고 저렇고 많이 했더니만
목사님 한 분이 딴지를 걸면서 하는 얘기가
“아이고 스님이 말하는 마음은 영성의 한 부분이죠.”
영성이라는 말은 성령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맞이하는, 영접하는, 받아들이는 마음을 영성이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별것이 없다는 얘기라는 걸 얼른 알아들었어요.
제가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목사, 신부, 수녀, 정녀, 천도교, 유교 이런 많은 성직자들이 모였을 때
‘영성의 불교적인 이해’라는 제목으로 강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성에 대해서 조금 압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 보고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알고 창조 했습니까, 모르고 창조 했습니까?”
그랬더니 “아니 모르고 어떻게 창조 합니까 알고 창조하죠.”
그래서 제가 “그러면 마음의 특성이 무엇인줄 아십니까?”이러니까
모른데요.
그러면 딴지나 걸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2등이나 하는데...
그 목사님 임자를 잘못 만난 거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마음의 특성은 아는 것입니다.
대상을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알고 창조했다고 했죠.
하나님의 속성이 뭡니까? 마음이잖아요.
결국 하나님 속성이 마음이라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마음이 창조했다는 말하고 똑같잖아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사에 보면 그노시스(gnosis)에
‘태초에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신과 같다.’ 분명하게 있습니다.
이게 결국 마음이 창조 했다는 거죠.
그런데 아뢰야식이 창조한 이 세계는
바로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물질하고 아뢰야식이 서로 상응해서 나타나는
보이는 세계에요.
이 아뢰야식이 정화가 되면 자성청정심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렇게 바뀐 자성청정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를 정토(淨土)라 그럽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보살들이 깨달은 만큼 이 세계를 장엄을 해서
중생들이 그 세계에 살게 하고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이끌어간다.
비로자나보살은 수많은 세월 동안에 화장장엄세계를 만들어가고,
지구도 화장장엄세계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비로자나부처님의 원력에 의해 태어나는 거예요.
자성청정심이 발현해서 나타나는 부처님이 비로자나부처님입니다.
이 비로자나부처님은 보살 시절부터 이 세계를 만들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거죠.
그래서 보이는 이 세계가 아뢰야식에 변현되어서 나타난 세계라는 거죠.
『능가경』에서
‘보이는 이 세계는 마음의 그림자다’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경험을 해보지 않아서 이렇게 말을 하면
진짜 맞을까 이런 의심도 해보고 그러죠?
하지만 이 말이 부처님 말씀이니까 믿어야 안 되겠습니까, 그죠?
그렇지만 증명은 할 수가 있다,
증명이 안 된다면 그건 곤란하죠.
자 보십시오.
여기 찻잔이 있습니다.
찻잔은 아뢰야식이 변현되어서 나타난다고 했죠?
그럼 물어 봅시다.
앞에 거사님, 이 찻잔이 어떻습니까?
그냥 느낌대로 감상만 하십시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아요.
어떻습니까?
“둥글다.”
그 뒤에 있는 보살님은?
“윤기가 나요”
“연꽃 같다”
세 분이 감상을 했는데
둥글다, 윤기가 난다, 연꽃 같다, 다 다르잖아요.
여러분들도 다르게 보일 거 아닙니까.
그렇게 보인다면 찻잔이 세 개가 있어야 되는데 실제는 하나란 말이에요.
만약에 찻잔이 말을 한다면
찻잔에 물어보면 어떨까요?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무소리 안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긴가 하면
우리가 그렇게 덮어 씌워서 본다 그거예요.
둥글게, 윤기 나게, 연꽃같이...
그럼 본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아뢰야식이 변현 되어서 그런식으로 나타난 거예요.
그 다음에 찻잔이 분위기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탁 던지면 깨져요.
조금 전에 있던 분위기 있는 찻잔은 없어진 거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 생각일 뿐이에요.
아마 찻잔에게 물어보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 겁니다.
내가 있다면 영원히 존재할 텐데 던지면 깨지니까 있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그렇게 본다면 보이는 이 세계는
시각을 통해서 나타나던지,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을 통해서 나타나든지
전부 다 순간순간 아뢰야식이 변현돼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거죠.
다음 봅시다.
눈병이 난 눈으로 헛것을 보듯
유정도 이 또한 그와 같아서
나쁜 습기 눈가림이 자리잡아서
장식의 눈 가운데 머무름이라.
헛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눈이 병이 났기 때문에 헛것을 본다는 거죠.
그럼 장식 자체가 잘못 된 게 아니고
나쁜 습기, 습기가 뭡니까? 반복되어서 모인 기운이죠.
나쁜 기운이 모여서 아뢰야식에 탁 달라붙어버리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아까 공부 했듯이
이것이(찻잔) 둥글다든지, 윤기가 난다든지, 연꽃모양이라든지 하는 것은
전부다 헛것을 본다 이거죠.
일체 대상 색이 아닌 모든 곳에서
보여 지는 일체 경계 모든 색이란
실체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니
있거나 없음을 멀리 떠나서
모든 것이 아뢰야식 드러내도다.
‘실체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니’
이것은(찻잔) 물질이 아니란 말이에요.
모양 색깔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보여 지는 일체 경계, 일체 대상들,
이런 것들에 보이는 모양과 색깔이란
실체가 없는 아지랑이 같다는 거죠.
물위 뜬 달과 같이, 거울 속에 있는 그림자와 같이,
꿈속에 꿈과 같이 없는 거예요.
‘있거나 없음을 멀리 떠나서
모든 것이 아뢰야식 드러내도다.’
그래서 이 관계하는 모습이
모양과 색깔이 다 어우러져 있지만 아뢰야식이다 이말 입니다.
그것을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줄여서 뢰야연기(賴耶緣起)라 그럽니다.
연기는 상호 관계성이죠.
이 모든 것은 상호 관계성의 모습인데
모양과 색깔이 다르고 분리된 것 같이 보이는 이런 것이 전부다
아뢰야식이 연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얘깁니다.
다음 게송은 깊이 있게 들어갑니다.
그대가 눈과 색에 의지하여서
무언가 알았다는 판단을 하나
헛것이 눈 가운데 머무르면서
뜨거운 불꽃 같이 흔들거린다.
두 번째 게송을 한문을 보면
‘인자의안색 이생사색식(仁者依眼色 而生似色識)’ 이렇게 되어있죠.
색은 물질이죠.
흙, 물, 불, 바람 4대의 원소가 집합되어서 나타나는 게 색인데
이것은 형상과 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게 전부다 마음인 식입니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란 말을 씁니다.
견분은 주관[보는 마음]이고 상분은 객관[보이는 세계]입니다.
견분을 견식(見識), 상분은 상식(相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주관도 마음[識]이고 객관도 마음[識]이라는 거죠.
객관도 마음이라니, 이게 금방 와 닿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수행]를 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몸 있죠?
사실 있죠?
그런데 공부를 하면 몸이 사라져 버립니다.
몸이 본래 색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행을 하니까 사라져서 텅 비어버렸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 ‘아! 모양과 색깔이 결국 내 마음이구나,
아! 잘못 알았구나, 헛것을 봤구나’ 이렇게 알게 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안다면 아옹다옹 싸우겠어요?
헛것을 보고 싸우고 있으니 그렇게 허망한 게 없죠.
안 그래요?
부부싸움 하지마세요.
헛것을 보고 그러는 거니까
잘못한다고 너무 야단치고 그러지 마세요.
그러니 내가 손해 본다 화내지 말고
연민심으로 불쌍하게, 사랑으로 감싸줘야 되겠죠.
‘헛것이 눈 가운데 머무르면서
뜨거운 불꽃 같이 흔들거린다.’
불꽃이 뭡니까?
실제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있는 듯이 보이는 모든 색법은
장식이 색습기와 만나 만든 것
살펴보면 없는 것을 있다고 함은
어리석은 중생의 허망한 분별.
‘있는 듯이 보이는 모든 색법은’
‘색법’은 물질의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있는 듯이 보이는 모든 물질의 현상은,
‘장식이 색습기와 만나 만든 것’
‘장식’은 아뢰야식이죠.
‘색의 습기와 만나’ 이 말은 서로 상응했다는 거죠.
이 말을 정확하게 얘기하면,
색이라는 것은 아뢰야식이 색습기와 더불어 상응한 것,
이렇게 번역하면 됩니다.
‘살펴보면 없는 것을 있다고 함은
어리석은 중생의 허망한 분별.’ 이것을 번역하면,
장식이 변하여 나타난 것은,
그 본질, 그 체는 있지 않음을 있다고 함은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 분별이다. 이렇게 해야 되겠죠.
그럼 여기서,
보이는 모든 것이 아뢰야식이라면,
주관도 아뢰야식이고 객관도 아뢰야식이라는 말인데,
그럼 아뢰야식의 대상이 몇 개나 있을까?
세 개가 있습니다.
기세간(器世間), 그릇 기(器)자, 모양과 색깔이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자연계 모든 것, 우주죠.
그 다음은 유근신(有根身), 우리 몸을 유근신이라 합니다.
마지막 하나는 종자(種子),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죠.
이 세 가지가 아뢰야식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집지(執持)라는 말을 씁니다.
잡을 집(執)자에 가질 지(持)자, 딱 붙들고 안 놓는 것,
누가? 아뢰야식이.
아뢰야식이 딱 붙들고 안 놓는 것은
기세간과 이 몸뚱아리, 그리고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입니다.
수만 년, 수억 년 살아온 정보가 모두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기세간, 유근신, 종자, 이 세 가지도 아뢰야식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주관, 객관으로 나타나는 것도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원효스님 말씀대로
우리는 내 밖에 따로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 같아도 천만의 말씀, 아니다.
대상에 자기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이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게 심리현상이라는 거죠.
우리가 지 마음이 나타나는 대상에 지가 속고 사는 거죠.
헛것을 보고....
‘아! 이 세상에 모든 것이 환이구나, 헛것이구나!’
이렇게 알면 실체가 없는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리되면 한도인, 일을 다 마친 한가한 도인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아뢰야식이 변현되어 나타난 모습이다.
이렇게 안다면, 오직 마음뿐이고 다른 경계가 없구나 하는
초지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거예요.
황벽(黃檗)선사의 전심법요(傳心法要)에 보면
‘마음 밖에 법 없고 법 밖에 마음 없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다 마음이라는 것이죠.
선가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깨달은 경지라는 것은 그와 같은 거죠.
적어도 모든 것이 전부 마음뿐이라고 확실하게 체득이 되면
초지의 경지, 진여의 자리에 들어간다,
왜? 환영의 본질은 진여거든요.
진여가 마음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어둡고 취하여서 방일하므로
앉고 눕고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순식간에 모든 사업 일으켜 가나
모두가 아뢰야식 활동이라네.
‘모든 사업’은 모든 현상이죠.
쉽죠?
어려운거 하나도 없죠?
그러면 너무 쉽게만 얘기하면 안 되니까
지금부터 어렵게 얘기 하겠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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