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게송 (강의 - 3. 무명이 세간을 변현해 낸다)

경호... 2011. 8. 27. 18:58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에 대한 게송 (강의 - 3) 대상을 요별함은 식이라 하고 전오식이 현재 경계 취함으로써 눈병으로 사람이 헛것을 보듯 보는 것을 따라서 미혹하나니 색들과 비슷하여 마음속에서 색 아닌 걸 색이라 생각한다네. ‘대상을 요별함은 식이라한다’ 이게 중요한 말입니다. 말나식은 ‘의’라 하고 ‘의식’은 ‘식’을 붙이죠. ‘의식’은 ‘의’에 ‘식’이 붙었으니까 대상을 요별하지만, 말나식은 ‘의’만 있어서 잠자는 것 같기 때문에 대상을 요별 안하거든요. 그래서 ‘식’의 특성이 대상을 잘 알아가지고 분별하는 게 특성인데 ‘식’자가 안 붙었으니까 말나식인 줄을 알 수가 있는 거죠. 대상을 요별하는 게 식이라 하는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이 그렇게 합니다. ‘전오식이 현재 경계 취함으로써’ 전오식(前五識)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이야기 합니다. ‘ 눈병으로 사람이 헛것을 보듯 보는 것을 따라서 미혹하나니’ 시각이나 청각이나 후각이나 미각이나 촉각이나 감각은 대상 따라서 마음이 미혹하는 겁니다. 이 감각은 항상 대상 따라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미혹이라 하느냐 하면, 감각은 시각이나 청각이나 어떤 감각이든 스스로 하지 않는다, 그 뒤에 의식이 영향을 주고 자아의식인 말나식, 아뢰야식이 영향을 주는데 특히 아뢰야식 속에 저장 된 종자의 정보에 영향이 있습니다. 이게 과거의 정보든 과거의 기억들 같은 그런 겁니다. 이런 것이 감각을 통해서 튀어 나오는데 거기서 상(想)과 사(思)가 일어납니다. 생각 상은 과거의 이미지이고, 생각 사는 미래의 이미지입니다. 그런 게 탁 튀어 나와요. 이건 과거와 미래가 나온다 이말 이예요. 이게 미혹입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돌아오지 않아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 미래가 나온다는 것은 뭡니까? 과거 이미지가 나오고 미래 이미지가 나온다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헛것이라는 거죠. 허망한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집착하는 건 미혹이죠. 현재 순간에 늘 깨어 있어야 되는 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죠. 그래서 감각을 통해서 튀어나온다 하는 겁니다. 그래도 이해 안 되죠? 현재 이순간의 세계는 매 순간 찰나찰나 변하기 때문에 형상과 색깔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각으로 보는 것은 과거 이미지를 보는 겁니다.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면 미래의 이미지죠. 그런데 이 찻잔 보면 일주일 전에 본 찻잔이나 지금 보는 찻잔이나 똑같이 보이잖아요. 똑같이 보이니까 같다는 것은 잘못 보고 있다는 거죠. 마음이 그렇게 조작해서 보고 있는 거예요. ‘색들과 비슷하여 마음속에서 색 아닌 걸 색이라 생각한다네.’ 여러분 보시기에 이게 찻잔 맞지요? 모양과 색깔, 이걸 색이라 그럽니다. 이 색은 색이 아닌데 마음속으로 우리는 이걸 색(모양과 색깔)이라 한다 그 말입니다. 자 어떤 모양입니까? 둥근 모양이죠? 색깔은 어떤 색입니까? 회색에 가까운 색이죠?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보는 것은 우리 마음도 그렇게 주관적으로 판단해서 보는 거지 사전에서 그렇게 말해 달란 적도 없고 둥굴다고 말해 달란 적도 없고 회색이라고 말해 달란 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 이예요. 이 자체가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매순간 변하는 게 보이지만, 육안으로 볼 때는 분명히 모양과 색깔이 고정되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는 것은 현실을 보는 게 아닙니다. ‘색 아닌 걸 색으로 본다’ 그럼 색 아닌 게 뭐냐 이거죠. 우리가 이런 모양과 색을 진짜로 보고 환으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경계를 지켜보는 훈련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지겨워합니다. 그러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온갖 현상이 생겼다 사라졌다 계속 반복을 하는데 이것을 계속 지켜보게 되면 일정한 모양과 색깔이 없음을 봐요. 인식 자체가 정지돼 버리는 겁니다. 판단 중지가 저절로 일어나는 겁니다. 화두를 참구하면 판단 중지가 일어나듯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판단 중지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이리 되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고 고요해 집니다. 그래도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시야도 넓어지고 보이는 게 환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 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요.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평범하게 일어나면 지겹거든요. 이게 뭐냐...? 생기고 없어져도 그렇고 일어나는 게 매번 그 현상. 이리 되면 지겨워서 공부 안 합니다. 그러나 자비수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굉장히 다양합니다. 다양하게 나타나니까 지루한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야 실체가 없고 자아 없음을 빨리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방 위빠사나를 하든, 자비수관을 하든, 염불을 하든, 화두를 들든, 어떤 수행이든 공부를 하면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게 몸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화두 참구를 해도 일어납니다. ‘선관책진(禪關策進)’을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화두를 들 때 의단이 잘 지속 되면 저절로 몸이 사라지고 의식만 남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깨달음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몸 사라짐 정도는 범부의 깨달음입니다. 거기서 더 용맹정진해서 나아가면 화두 속으로 들어가고 화두 타파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도 사라져 버리면 몸도 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아! 몸은 몸이 아니구나!’이리 됩니다. 미얀마 있을 때 학생인데 잠시 출가해가지고 1주일 정도 수행을 한 어떤 수행자가 ‘스님,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명칭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까?’ 이러는 겁니다. 현재는 가려우면 가렵다, 아프면 아프다 명칭을 붙이다가 나중엔 아픔도 묘하게 아프고, 가려움도 희한하게 가려워질 때는 거기에 딱 맞는 적절한 단어가 없어요. 그래서 현상과 언어가 확실히 별개의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이 학생이 그걸 체험한 거예요. 마음이 일어나는 현상은 똑같아요. 언어를 붙일 수 없다는 거죠. 이게 저절로 불립문자예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불립문자가 되는 거예요. 이런 현상이 화두 참구할 때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 학생이 ‘도대체 이게 정확한 단어를 붙일 수가 없다’는 거죠. 나중에 또 와서 하는 말이 ‘아! 스님 너무 빨리 지나가서 명칭을 못 붙입니다.’이러는 거예요. 명칭 붙여서 다시 알아차림 하면 사라져 버리고 없는 거예요. 이러면서 몸이라는 본질을 알게 되면 아! 몸이 집이 아닌 걸 집이라 생각했구나, 물질이 아닌 걸 물질이라 생각했구나, 아는 거죠. 좀 더 나아가면 대승에서는 그것만이 아니다, 보이는 이 세계 자체도 마음의 그림자고 마음의 투영이고 자기 마음이다, 이렇게 알면 굉장하죠.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도 그때 느끼게 되는 겁니다. 비유하면 마니주의 구슬과 같이 햇님 달님 빛살이 비추는 곳에 비추이는 장소 따라 감응하여서 제 각자가 같은 빛을 쏟아 내린다. 마니주라는 말이 마니구슬이란 말인데 무색투명하고 본래 색상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구슬에 빛을 비추면 비추는 상태에 따라 반응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빨간 빛을 비추면 빨간색에 반응을 하고 파랗게 비추면 파랗게 반응하는 게 마니구슬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오색의 빛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마니주에는 없지만 주위에 오색색깔에 따라서 오색을 띄운다는 거죠. 그러니 마찬가지로 색상이나 빛이 마니주에 비추면 비춤에 따라서 똑같은 빛을 쏟아내는 거죠.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다음 구절에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아뢰야가 이 또한 그와 같아서 함장된 여래의 청정한 식이 무명의 습기와 화합하여서 두루두루 세간을 변현해내며 청정한 무루법과 상응하여서 모든 공덕, 비와 같이 쏟아 내린다. ‘아뢰야’라는 것은 마치 마니주와 같아가지고 쉽게 말해서 백지와 같습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냥 바탕이 깨끗해요. 깨끗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여래의 자성청정심하고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백지같이 깨끗한 게 온갖 선악의 종자가 아뢰야식 속에 저장을 하니까 이 아뢰야식 자체가 온갖 선악의 종자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여래의 자성청정심이 같이 있는 거예요. 이것이 무명의 습기 영향을 입으면, ‘습기’라는 것은 종자라는 뜻이에요. ‘습’이라는 말은 ‘훈습’된 걸 얘기 하는데 ‘무명’은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는 마음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서 이놈이 아뢰야식에 영향을 줍니다. ‘두루두루 세간을 변현해내며’ 그 영향을 받아서 이 세계를 무지의 세계로 막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 아뢰야식은 마니주와 같기 때문에 그 안에 자성청정심이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법문을 듣거나 수행을 하게 되면 공덕을 막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청정한 무루법과 상응한다’, 무루(無漏), 샘이 없는, 법(法), 샘이 없는, 번뇌가 없는 깨끗한 마음 현상이죠. 법이라 하는 것은 그런 현상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런 현상하고 상응을 해가지고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공덕이 비 쏟아지는 것 같이 막 쏟아져요. 그래서 깨달아가지고 보살의 위치만 가더라도 중생을 구제하잖아요. 그게 아뢰야식 속에 같이 있는 자성청정심이 발현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아뢰야식은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백지와 같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아뢰야를 진(眞)과 망(妄)이 화합되어 있다 해서 진망화식(眞妄和識)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 자체는 마니주와 같이 텅 비어 색깔이 없는 것이지만,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어우러져 있는 게 아뢰야식입니다. 그래서 수행한다는 것은 이 진(眞)과 망(妄)이 화합되어 있는 것을 깨트려서 진(眞)이 다시 드러날 수 있게 망(妄)을 없애는 겁니다. 그것을 진여라 하고 깨달음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없애느냐, 허망하다는 것은 마음이 유전(流轉)하는 것을 얘기 합니다. 마음이 유전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 유전합니다. 좋은 감각이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니까 고통을 받는다. 고통을 받으면서 또 업을 짓고, 이렇게 순환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저장된 선악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그런 과정에서도 자극을 일으키고 사랑하고 집착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마음이 흘러갑니다. 또 저장이 되었다, 또 튀어 나왔다,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끊임없이 유전하는 거죠. 이렇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까? 끊어야겠죠. 그래서 감각 관찰을 많이 주장하는 겁니다.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잘 봐라. 감각을 통해서 아뢰야식에 저장 된 정보가 막 튀어나오지만 이 튀어나오고 사라지는 것은 다 허상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생각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평온이 오고 자성청정심이 발동을 합니다. 그리되면 그동안에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없어지면서 ‘니 죽고 내 살자’가 ‘니도 살고 내도 살자’ 이리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남을 배려하고 베풀고 어려우면 도와주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하는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안 생기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내도록 절에 스님들이 기도를 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아뢰야식의 장에 오염된 흐름을 깨끗한 흐름으로 싹 바꾸는 겁니다. 『원각경』에 ‘원수를 부모 같이 섬겨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절대 남을 미워하지 마세요. 미워하는 사람 있으면 오히려 공경하고, 잘 되기를 축원해줘야 됩니다. 남한테서 무엇인가를 바라지 말고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