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게송 (강의 - 2. 염오의[七識] 작용)

경호... 2011. 8. 27.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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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에 대한 게송 (강의 - 2) 자기 마음 깨닫지 못함으로써 식을 따라 경계가 나타나네 자기 마음 요지하여 알아버리면 땔감이 불에 타서 없어지듯이 번뇌 없는 무루를 통달하리니 이와 같은 사람은 성인이라네. 요지(了知)는 안다는 말이고 무루(無漏)는 샘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얘기하자면 마음이 대상(모양, 색깔, 소리, 향기, 맛, 촉감)에 따라 움직이는데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가지고 바깥으로 마음이 흘러가죠. 이렇게 흘러가는 걸 ‘샌다(漏)’ 그럽니다. 반대로 바깥 대상이 아무리 나타나더라도 내 마음이 거기에 따라 흘러가지 않는 걸 ‘무루(無漏)’라 그럽니다. 위에 게송에서 ‘자기 마음을 요지하여 알아버리면’ 이렇게 했는데 자기 마음의 정체를 알아버리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그럼 유식에서 얘기하는 마음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냐? 미리 얘기 하자면 눈에 보이는 이 세계도 전부 다 아뢰야식의 변형된 모습인데 우리는 착각해서 내 밖에 따로 있는 것으로 본다는 거죠. 그래서 따로 있는 대상에 따라서 내 마음을 움직이니까 이런 걸 미혹이라 그러고 이런 미혹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겁니다. 마음 전체를 안다는 것은 바깥 보이는 이 세계도 아뢰야식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게 자기 마음인줄 안다면, 따로 이것을 내것이라고 할 필요도 없고 내 밖에 따로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거죠. ‘내것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너와 내가 분리 돼 가지고 애착과 집착이 일어나고 거기서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 하는 싸움이 일어나죠. 보이는 이 세계가 자기 마음의 변형인줄 안다면 그럴 수가 없지요. 원효스님께서 우리 바깥세상이라는 게 알고 보면 그게 모두 자기 마음이다,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이념과 종교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너와 내가 본래 둘이 아닌 한 몸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착각 속에 내 밖에 따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내세운다는 거죠. 그래서 교화할 대상이 따로 있고, 교화할 자가 따로 있어서 무얼 자꾸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리되죠. 도대체 전쟁이 왜 일어나느냐 이거죠. 무엇을 빼앗아야 되고,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게 있다는 것은 이 세계 자체가 자기 자신인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이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분명합니다. 자비라는 말을 왜 쓰는지 알 수 있는 거예요. 자비라는 말은 너, 나가 본래 둘이 아닌 하나다 라는 겁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자비심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래서 『유마경』에 이야기 했듯이 중생을 어떻게 봐야 될 것이냐, 물에 뜬 달과 같이 보고, 돌 여자가 아이 낳는 것처럼 봐라.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는 거죠. 중생은 본래 있는 게 아니다. 중생이 본래 공한 줄을 알면 자비심이 생긴다. 그렇지만 정작 중생은 중생이라는 탈을 쓰고 거기에 갇혀서 못 벗어나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그런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냅니다. 그 바탕은 공(空)입니다. 비어있다는 거죠. 공은 너, 나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전체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공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과도하게 어떤 행동을 하는 그 이면에는 삿된 견해, 잘못된 견해가 자리 잡은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아무리 나를 나쁘게 보고 험악하게 하더라도 한 뿌리라는 사실을 알면 그에 대한 마음이 누그러지죠. 그래서 여기 게송에도 ‘번뇌가 없는 무루를 통달하리니’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땔감이 불에 타서 없어지듯이’하는 것은 땔감이 다 타서 재가 되듯이 번뇌가 다 사라진 상태를 니르반나, 열반[불생불멸]이라 그럽니다. 수행의 시각에서 얘기하면,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착각을 많이 일으키는 게 수행의 현상이 나타나야 만이 수행을 하는 것 같이 생각을 한다는 거죠. 이게 초보자 시절에 다 그렇게 합니다. 특히 자비수관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나는 남들과 수행을 똑같이 하는데 왜 나한테는 그런 게 안 생기느냐? 수행을 잘못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무엇인가 생기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걸 자꾸 만들어 낼 때 생기는 게 있어요. 우리가 수행 하지 않은 범부 상태에서는 뭘 자꾸 만들어 내는 거예요. 만들어 내면 사라지니까 허전해서 또 만들어 내는 거죠. 그러나 수행을 할 때 생기는 현상은 묻혀있던 것이 드러나면서 없어져 가는 것들입니다. 관찰을 제대로 안하면 생겼던 것이 반복해서 또 생기니까 관찰을 잘해야 되겠죠. 한번 생긴 것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생긴 것 자체가 허상인줄 알아야 됩니다.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면 다음부터는 그 영상이 안 생깁니다. 그리고 다른 영상이 계속 생기면 생길수록 없어지니까 좋습니다. 그러다가 공부를 계속 해가면 생기는 현상들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없어져 가는 것이 좋은 겁니다. 무엇인가 생긴다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무엇인가 마이너스 나는 심리 현상입니다. 심리현상이라는 것이 유루, 바깥으로 튀어 나가는 마음 작용인데 이런 것이 점점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엔 몸 사라져 버리고, 엉덩이 감각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져 가고, 이런 겁니다. 이렇게 없어져 가는 게 적멸(寂滅)로 가는 길이라 합니다. 번뇌가 고요한 것을 적(寂)이라 하고, 고통의 원인과 고통이 소멸 한 것을 멸(滅)이라 합니다. 즉 열반입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뭐가 생겨야 된다고 생각하니 잘못 된 거죠. 공부를 하면 점점 없어져 갑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마음이 허상인줄을 확실히 꿰뚫어 알면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없어진다[無漏]는 겁니다. 그럼 그런 이들이 성인이라는 거죠. 이렇게 공부를 하면 바깥경계가 마음 현상인줄을 알게 됩니다. 장식이 많은 경계 변현해 내어 세간을 가득하게 이끌어가고 염오의[七識]로 나와 내 것 집착하여서 사량으로 영원히 흘러간다네. 장[藏]은 아뢰야를 말합니다. 아라야식은 장식(藏識)이라 하여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의 세 가지가 있다고 지난 시간에 얘기했습니다. 능장은 모든 정보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소장은 그 정보들이 창고에 머물고 의지하게 하고, 집장은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집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죠. 그럼 장식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감출 장자는 창고 역할, 집의 역할을 하고, 또 한편은 창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많은 경계를 변현해 낸다’라고 한 거예요. 심리적인 얘기 좀 하겠습니다. 이 아뢰야식의 전체를 알게 되면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모든 정보는 저장되기 때문에 바른 수행이다, 바르지 않는 수행이다 가려내기도 합니다. 나한테 잘못된 게 저장되면 힘들어지는 거예요. 잘못된 게 저장 되면 계속 현재의식에 영향을 줍니다. 현재의식이라는 것은 아뢰야식 속에 종자가 발현되어 나온 것들인데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도 자각, 알아차림이 없는 수행은 안 됩니다. 자각이 있는 수행은 생각의 흐름을 즉각즉각 끊어가기 때문에 아뢰야식에 종자로 정보가 저장이 안 됩니다. 저장이 안 되면 현재의식에 영향을 안 받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보고 듣는 대로 계속 마음에 저장을 합니다. 식물에도 그게 나타난답니다. 어떤 사람이 온실에 들어가서 화분 같은 걸 엎었다면 측정을 해보니까 다른 사람은 온실에 아무리 들어가도 괜찮은데 그 사람만 들어가면 이상하게 반응을 한답니다. 개도 그렇답니다. 개한테 밥도 안주고 못살게 굴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개가 그것을 기억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만 가면 막 짖고 난리를 칩니다. 이런 게 모두 아뢰야식의 작용입니다. ‘염오의[七識]로 나와 내 것 집착하여서 사량으로 영원히 흘러간다네.’ 아뢰야식이 ‘나[我]’고, ‘내 것이다’라고 집착하는 게 말나식이죠. 이게 자아의식입니다. 이 아뢰야식에 집착하는 말나식은 끊이지 않고 영원히 흘러간다는 거죠. 모든 식에 차별이 있게 되나니 제각기 자기 경계 요별하면서 쌓이고 익힌 업이 마음이 되고 쌓인 업에 두루한 것 염오의라네. 여기서 ‘모든 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말나식을 얘기하죠. 이런 식에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 아뢰야식의 장식 때문입니다. 모든 정보가 아뢰야식에 저당되어 있다가 발현하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말나식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곱 개의 식을 ‘굴러서 나온다’, ‘구를 전(轉)’자를 써서 전식(轉識)이라 합니다. 발현되어서 나왔다가 다시 저장되었다가 발현되었다가...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은 반드시 대상을 요별(了別)하는 데 있다. 요별은 ‘알 료(了)’자에 ‘나눌 별(別)’자, 차별을 잘 분별한다는 거죠. 옳고 그름, 높고 낮음 등을 분별하는 거죠. 시각으로도 그렇고, 청각으로도,.... 말나식도 그렇습니다. 단, 말나식은 대상을 인식하기는 하지만 표가 안 난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제각기 자기 경계를 요별한다’이런 얘기죠. ‘쌓이고 익힌 업이 마음이 되고’ 보고, 듣고 해서 인식을 하게 되면 그것이 업이 되고 자기 마음이 된다는 겁니다. 업이 되고 마음이 된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제가 가끔 듣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 분이 ‘스님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이런 것을 물어요. 제가 제일 곤혹스러운 것 중에 하난데, 그래서 ‘저는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럼 좋아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런 것을 왜 묻습니까?’ 물어보는 게 뭔가 하면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그가 청국장을 좋아해서 계속 먹는다면 그게 업이 되가지고 자기 마음이 되는 거죠. 그래서 누군가 옆에서 ‘청국장’하면 그 업으로 인해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 침이 도는 거죠. 제가 태국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비닐봉지에 콜라를 담아 주는데 그 안에다가 얼음까지 채워줍니다. 이게 맛이 있어요. 그 뒤로 태국을 몇 번 갔는데 갈 때마다 먹게 되더라구요.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콜라가 굉장히 시원한 게 맛이 있어요. 그게 업이고, 갈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마음이에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니까 입안에 침이 고이거든요. 지금은 가급적 콜라를 안 먹습니다. 그래서 ‘업이 되는 것은 마음이 된다’는 것이죠. ‘쌓인 업에 두루한 것이 염오의라네.’ 이 말에 배경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쪽으로 업을 받고 그런 마음이 생기고 의식쪽으로도 그렇게 마음이 되는 것은, 뒤에 시각에도 영향을 주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영향을 주고 의식에도 영향을 주는 염오의가 있다. 염오의는 자아의식, 말나식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함장식, 이놈이 영향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쌓인 업에 두루한 것’이라고 표현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