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게송 (본문)

경호... 2011. 8. 2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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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게송 (본문) 54-1-178 密嚴經偈云. 是時金剛藏 復告大衆言 賴耶無始來 爲戱論熏習 諸業所繫縛 輪轉無有窮. 亦如於大海 因風起波浪 恆生亦恆滅 不斷亦不常. 『밀엄경』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 때에 금강장 보살께서는 다시금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제팔식인 아뢰야가 무시이래로 쓸데없는 희론으로 훈습되어서 모든 업에 매이고 묶이어지니 굴러가는 모습이 끝이 없어라. 이 또한 비유하면 큰 바다에서 바람으로 풍랑이 이는 것 같아 되풀이 생겨났다 또한 멸하니 단멸이나 항상함도 아니로구나. 由不悟自心 隨識境界現 若了於自心 如火焚薪盡 通達於無漏 則名爲聖人. 藏識變衆境 彌綸於世間 意執我我所 思量恆流轉. 諸識類差別 各各了自境 積集業爲心 遍積集名意. 자기 마음 깨닫지 못함으로써 식을 따라 경계가 나타나네. 자기 마음 요지하여 알아버리면 땔감이 불에 타서 없어지듯이 번뇌 없는 무루를 통달하리니 이와 같은 사람은 성인이라네. 장식이 많은 경계 변현해 내어 세간을 가득하게 이끌어가고 염오의로1) 나와 내 것 집착하여서 사량으로 영원히 흘러간다네. 모든 식에 차별이 있게 되나니 제각기 자기 경계 요별하면서 쌓이고 익힌 업이 마음이 되고 쌓인 업에 두루한 것 염오의라네. 了別名爲識 五識取現境 如瞖見毛輪 隨見而迷惑 於似色心中 非色計於色. 譬如摩尼珠 日月光所照 隨其所應現 各雨自類物. 阿賴耶亦爾 如來淸淨藏 和合於習氣 變現周世間 與無漏相應 雨諸功德法. 대상을 요별함은 식이라 하고 전오식이 현재 경계 취함으로써 눈병으로 사람이 헛것을 보듯 보는 것을 따라서 미혹하나니 색들과 비슷하여 마음속에서 색 아닌 걸 색이라 생각한다네. 비유하면 마니주의 구슬과 같이 햇님 달님 빛살이 비추는 곳에 비추이는 장소 따라 감응하여서 제각자가 같은 빛을 쏟아 내린다. 아뢰야가 이 또한 그와 같아서 함장된 여래의 청정한 식이 무명의 습기와 화합하여서 두루두루 세간을 변현해내며 청정한 무루법과 상응하여서 모든 공덕, 비와 같이 쏟아 내린다. 譬如乳變異 成酪至酪漿 藏識亦如是 變似於衆色. 如瞖見毛輪 有情亦復爾 以惡習氣瞖 住藏識眼中. 於諸非色處 此所見諸色 猶如於陽焰 遠離於有無 皆賴耶所現. 비유하면 우유가 변화하여서 버터 되고 질이 좋은 치즈가 되듯 중생의 장식도 이와 같아서 많은 경계 비슷하게 변화해 낸다. 눈병이 난 눈으로 헛것을 보듯 유정도 이 또한 그와 같아서 나쁜 습기 눈가림이 자리 잡아서 장식의 눈 가운데 머무름이라 일체 대상 색이 아닌 모든 곳에서 보여 지는 일체 경계 모든 색이란 실체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니 있거나 없음을 멀리 떠나서 모든 것이 아뢰야식 드러내도다. 仁者依眼色 而生似色識 如幻住眼中 飄動猶熱焰. 色皆是藏識 與色習相應 變似體非有 愚夫妄分別. 諸惛醉放逸 坐臥及狂走 頓起諸事業 皆是賴耶識. 그대가 눈과 색에 의지하여서 무언가 알았다는 판단을 하나 헛것이 눈 가운데 머무르면서 뜨거운 불꽃 같이 흔들거린다. 있는 듯이 보이는 모든 색법은 장식이 색습기와 만나 만든 것 살펴보면 없는 것을 있다고 함은 어리석은 중생의 허망한 분별. 어둡고 취하여서 방일하므로 앉고 눕고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순식간에 모든 사업 일으켜 가나 모두가 아뢰야식 활동이라네. 猶如盛赫日 舒光照於地 蒸氣如水流 渴獸望之走. 賴耶亦復爾 體性實非色 而似於色現 惡覺妄生著. 如磁石吸鐵 迅速而轉移 雖無於情識 似情識而動. 사막에 이글대는 태양 같아서 뻗치는 광명이 땅을 비춤에 신기루가 물과 같이 흘러 보여서 목마른 짐승이 보고 달린다. 중생의 아뢰야도 그와 같아서 바탕의 성품이 색이 아닌데 일체 색과 비슷하게 드러나오니 잘못 알아 허망하게 생긴 것을 집착 한다. 자석이 철사를 끌어당기듯 신속하게 자리를 이동시키니 실제의 정식(情識)이 없을지라도 정식과 비슷하게 움직여 간다. 如是賴耶識 爲生死所攝 往來於諸趣 非我而似我. 如海中漂物 無思隨水流 賴耶無分別 後身而運動. 譬如二象鬪 被傷者永退 賴耶亦如是 斷染無流轉. 이와 같이 중생의 아뢰야식은 생사의 흐름 속에 들어가 있어 육도의 윤회 속에 오고 가는데 참 나가 아니면서 나인 듯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표류물들이 생각 없이 물결 따라 흘러가듯이 아뢰야도 결정된 분별이 없이 중생 몸을 따라서 움직여 간다. 두 마리 코끼리가 싸움하다가 부상당한 코끼리는 물러나듯이 중생의 아뢰야도 이와 같아서 염법이 끊어지면 흐름이 없다. 譬如淨蓮華 離泥而皎潔 人天皆受用 莫不咸珍敬. 如是賴耶識 出於習氣泥 轉依得淸淨 佛菩薩所重. 譬如殊勝寶 野人所輕賤 若用飾冕旒 則爲王頂戴. 비유하면 청정한 연꽃 같아서 진흙탕을 벗어나 청결하다네. 하늘과 땅 모두가 수용하여서 모두 다 보배로서 공경한다네. 이와 같은 중생의 아뢰야식이 습기의 진흙탕을 벗어난다면 조건이 바뀌어서 청정해지니 부처님 보살들이 소중히 하네. 비유하면 수승한 보배와 같아 천민들은 알지 못해 경멸하지만 임금의 왕관에 장식이 되면 만인의 왕 머리에 올려진다네. 如是賴耶識 是淸淨佛性 凡位恆雜染 佛果常寶持. 如美玉在水 苔衣所纏覆 賴耶處生死 習氣縈不現. 於此賴耶識 有二取相生 如蛇有二頭 隨樂而同往. 이와 같은 중생의 아뢰야식도 청정한 부처님의 성품이지만 범부의 지위에선 오염이 되고 부처님 자리에선 보배로구나. 아름다운 하얀 옥이 물에 있으면 물이끼로 때가 절어 덮여 버리듯 아뢰야도 생사 속에 처해 있으면 습기로 얽히어서 못 나타나네. 이와 같은 중생의 아뢰야식에 취하고 취해지는 두 가지 모습 뱀에게 두 개의 머리가 있어 즐거움 쫓아서 같이 가듯이. 賴耶亦如是 與諸色相具 一切諸世間 取之以爲色. 惡覺者迷惑 計爲我我所 若有若非有 自在作世間. 賴耶雖變現 體性恆甚深 於諸無智人 悉不能覺了. 중생의 아뢰야도 이와 같아서 모든 색상 더불어 함께 한다네. 존재하는 일체 세간 모든 모습들 이들을 취하여서 있다고 하네. 깨달음을 잘못 알아 미혹하여서 나를 세워 나의 것을 생각하나니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이 자재하게 세간을 지어낸다네. 아뢰야식 변화하여 나타나지만 바탕의 성품은 항상 깊어서 지혜 없는 사람에게 일러 주어도 모두가 깨달아서 알 수가 없네. 譬如於幻師 幻作種種獸 或行而或走 似有情非實. 賴耶亦如是 幻作於世間 一切諸有情 體性無眞實. 凡愚不能了 妄生於取著 起微塵勝性 有無異分別 及與於梵天 丈夫等諸見. 비유하여 능력 있는 요술쟁이가 거짓으로 여러 가지 짐승 만드니 가기도 하면서 뛰기도 하여 살아 있는 동물이나 실재 아니다. 중생의 아뢰야도 이와 같아서 거짓으로 일체 세간 만들어내니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유정들 바탕의 성품이 진실 아니다. 범부는 어리석어 알지 못하여 허망하게 분별하여 집착을 내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생각 일으켜 있다 없다 다르게 분별하다가 범천이나 장부라는 견해를 낸다. 大乘阿毘達摩雜集論云. 識之於根 乍出乍入 如鹿在網 猶鳥處籠. 啄一捨一 周而復始 無暫休息. 識在根籠 亦復如是. 或在於耳 或在於眼 來去無定 不可執常. 雖復無定 相續不斷. 何爲不斷. 以妙用無間故. 若凡夫爲色塵所縛 不得自在. 若見一法則被一法礙 不能圓通法界. 是以 金剛經云 若菩薩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則無所見. 또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根)에서 일어나는 식(識)의 활동이 근(根)에서 잠깐씩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습이 사슴이 그물망 속에 있는 것과 같고, 새들이 새장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이들 사슴과 새들이 갇혀 있는 굴레를 벗어나려 쪼다 포기하고, 굴레 속을 빙빙 돌다 다시 쪼기 시작하니 잠시도 쉴 여가가 없다. 식(識)이 근(根)이란 굴레 속에 있는 것도 이와 같다. 혹 귀에 있기도 하고, 혹 눈에 있기도 하여 오고 가는 것이 일정치 않아 항상 있다고 집착할 수 없다. 비록 정해진 모습이 없을지라도 이어져 가는 모습은 계속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단멸하지 않는 것인가. 묘한 작용이 사이사이에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범부가 색진(色塵)에 결박당한다면 자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법을 보면 한 가지 법의 장애를 받아, 법계에 원만히 통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한다면 이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首楞嚴經云 由塵發知 因根有相 相見無性 猶若交蘆. 由塵發知者 卽見分. 因根有相者 卽相分. 相見無性者 心境互生 各無自體. 心不自立 由塵發知. 境不自生 因根有相. 二虛相倚 猶若交蘆. 知見立知 卽無明本. 知見無見 斯卽涅槃. 但了了見 無可見 卽通法界見 卽是涅槃 若了了聞 無可聞 無可聞卽通法界聞 卽是涅槃. 一切諸法 本來涅槃 以分別心 妄見所隔 不知自識 翻作無明. 『수능엄경』에서는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知見)을 일으키고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 보이는 모습과 보는 지견에는 결정된 성품이 없어 마치 서로 서로 교차하여 의지해서 서 있는 갈대의 모습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을 일으킨다는 것은 견분(見分)이다.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는 것은 상분(相分)이다. 상분과 견분에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것은 마음과 경계가 서로 생겨나게 하나, 제각각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은 스스로 혼자 설 수 없으므로 티끌경계로 말미암아 지견을 일으킨다. 경계가 스스로 생겨날 수 없으므로 근(根)으로 인하여서 모습이 있게 된다. 두 가지 허망한 것이 서로 의지하는 게 마치 홀로 설 수 없어 서로 교차하여 의지하는 갈대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知見)에 알았다는 주장을 세우면 무명의 근본이 된다. 지견(知見)에 달리 보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열반이 된다. 단지 확실하게 보면서 볼 것이 없다면 법계에 통하여 보는 것으로 열반이다. 만약 확실하게 들으면서 들을 것이 없다면 법계에 통하여 듣는 것으로 열반이다. 일체제법이 본래 열반이나 분별심의 허망한 견해로서 간격이 생긴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리어 무명이 된다.
    註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