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4. 무상천無想天)

경호... 2011. 8. 24.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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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4) 이와 같이 오염된 말나식이란 말나식은 자아의식이니까 오염의 근원이고, 말나식이라는 것은 아닐 비(非)자 비량이라고 해서 바른 인식이 하나도 없고 그릇된 인식만 합니다. 이런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자기 대상으로 하여 아뢰야식이 ‘내’다 하는데 아뢰야식 근본이 무(無)하고 공(空), 연기인 줄을 모르고 말나식은 이것을 자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자아를 근거로 해서 아뢰야식은 ‘내다’라고 하니까 그때부터는 말나식이 아닐 비(非), 헤아릴 량(量), 비량이 되는 겁니다. 즉 인식이 바르지 못하다는 거죠. ‘오염된 말나식이란’이 말이 그런 얘깁니다. 무엇에 오염이 됐느냐? 여기 아뢰야식이 있다면, 이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보고 말나식이 ‘이건 내다’라고 하기 때문에 이 말나식을 자아의식이라고 그럽니다. 견분, 이것은 주관을 얘기 합니다. 나중에 아뢰야식 공부를 하겠지만 아뢰야식은 24시간 늘 깨어있고 작용을 해요. 아뢰야식의 인식 대상은 몸과 보이는 삼라만상 모든 자연계와 저장되는 정보, 종자, 이 세 가지가 아뢰야식의 대상입니다. 그걸 상분(相分)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은 늘 그걸 보고 있기 때문에 상분이라고 그럽니다. 분(分)이라 하는 것은 구분이라는 말이고 상(相)은 보여진다는 뜻입니다. 이 보여 지는 부분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몸이 있고, 종자, 그 다음에 자연계, 이게 전부 다 아뢰야식입니다. 삼라만상이 그냥 아뢰야식입니다. 아뢰야식의 견분을 보고 알아듣는 게 말나식이다. 또 아뢰야식의 근본은 무아이고, 공이고, 연기하는 연기입니다. 그러니까 자아는 아닌데 자아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말나식이 대상 인식을 할 때에는 항상 잘못 인식한다. 아닐 비, 헤아릴 량자 이게 인식 부분이에요. 이렇게 그릇되게 인식 하는 것이 말나식의 특징이다. 이건 왜 중요한가 하면 말나식은 인식을 하더라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사물 인식 하지만, 잠자는 것, 선악 구분 다 하는데도 표가 안 납니다. 이게 어려운 얘깁니다. 프로이드 얘기를 한번 해보죠. 프로이드가 백여 년 전에 무의식을 발견했습니다. 말나식도 잠재의식이기 때문에 무의식에 속합니다. 그게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예를 들어 꿈을 꾸는데 그 꿈의 내용은 어디에서 오냐는 거죠. 무의식에서 온다, 꿈을 분석하면 사람의 모든 삶을 알 수가 있다, 이게 프로이드 심리학에서 말하는 겁니다. 프로이드 이후에는 이게 발전해서 연상 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영상을 가지고 심리를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꿈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는 방법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왜 중요하냐? 인간은 과거를 먹고 사는 존재에요. 늘 얘기하지만 여러분들 10년 전, 20년 전 안 잊어버리잖아요. 선 보고 데이트하고 약혼식 하고 결혼식 하고 이런 것들은 안 잊어버리죠. 아이 낳는 일은 더 잊어버릴 리가 없고, 지나온 것이지만 다 기억을 하잖아요. 그러면 과거는 지나가고 없는데, 그 정보들은 왜 기억으로 남느냐? 그 정보들이 전부다 아뢰야식에 머물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아뢰야식에 대해서 ‘내’라고 생각하는 게 말나식인데, 말나식이든 아뢰야식이든 표층의식이 아닌 이상 무의식이라고 해야겠죠. 그래서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뭐라고 하냐면, 프로이드 이전의 철학들은 의식을 근거한 철학인데 프로이드에 와서 그것이 와르르 다 무너졌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이 유식은 언제부터 이야기 됐느냐? 본격적으로 이야기 된 게 3세기 후반부터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럼 프로이드가 백 년 전에 무의식을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너무 다르잖아요. 여러분들이 유식이 어렵다는 것은 표층의식만 이야기하면 다 쉬울 건데, 의식상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 말나식이니 아뢰야식이니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렵게 느껴지는 거죠.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이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래요? 이를테면 말나식이라고 하는 것이 오염덩어리이다, 오염의 근원이라는 겁니다. 자아의식이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자아’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건데 아뢰야식을 ‘내’라고 삼았으니까 잘못된 거죠. 그래서 여기 구절에 “이와 같이 오염된 말나식이란.”이런 말을 쓰는 겁니다. 요별하는 육식의 의지처이니 요별한다는 것은 분별하는 겁니다. 육식(六識)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이 여섯 가지는 전부 다 말나식을 의지해서 작용을 하는 겁니다. 제칠식이 멸하지 않을 때에는 육식의 속박에서 못 벗어나네. 제칠 말나식이 없어지면, 육식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거죠. 즉 바꿔 말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 하는 모든 끄달림이 너무너무 거기[말나식]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속박을 조정하는 놈이 말나식이란 거죠. 그래서 이 말나식이 항상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이런 속박되는 거 얘기 해 볼까요? 좋은 물건만 있으면 시각적으로 좋게 보이기 때문에 가지고 싶다는 탐욕이 일어나죠. 그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라 하죠. 그건 자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러 갔는데 누가 벌써 사갔으면, ‘아이고 내가 한 발 늦었다!’이러죠. 이게 속박입니다. 자존심도 같아요. 누가 자존심 긁은 소리를 했다면 집에 가서 종일 그 생각만 하죠. 의식상으로 일어난 자존심이지만 자아의식의 발동이거든요. 그 뒤에는 말나식이 있어서 다 조정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하는 순간순간 속박 아닌 게 없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는데, 십이연기법에도 분명히 얘기하고 있거든요.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이 열 두개의 고리가 늘 반복해서 일어나는데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다음에 촉부터 일어납니다.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무언가 접촉하면 감각이 일어나요. 접촉해서 감각이 일어나면 갈애, 사랑이 일어나고 집착[취]을 통해 업[유]이 일어나고 생과 노사가 생깁니다. 촉(觸), 수(受)는 시각에서도 일어나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서도 일어나고, 의식에서도 일어나고, 말나식에도 일어나고, 그 다음에 아뢰야식에도 일어납니다. 접촉이 있으면 감각이 있는데, 당연한 겁니다. 감각에는 세 종류가 있는 있습니다. 즐거운 감각, 싫은 감각, 즐겁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무덤덤한 감각. 아주 좋다는 느낌이 들면 ‘쾌(快)’로, 싫은 느낌이 들면 ‘불쾌(不快)’로 갑니다. ‘쾌’로 가면 추구하는 마음, 사랑으로 갑니다. 사랑은 집착이고, 집착은 소유입니다. 집착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물건에 집착, 몸에 집착, 사랑에 집착 등 이런 집착을 통해서 업을 짓습니다. 선악의 업을 지으니까 결과는 고락(苦樂)이 옵니다. 선업을 지으면 낙이 오고, 악업을 지으면 고가 오는 거죠. 이를 통해 다음 생을 결정하죠. 다시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겁니다. 즉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접촉함에 따라 이 모든 연쇄반응이 매 순간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 연쇄반응 속에는 ‘내’라고 하는 게 들어가 있습니다. 의식이 주체가 되어서 저런 심리가 일어나더라도 뒤에 항상 말나식의 오염에 근원 덩어리, ‘내’라 하는 게 있어서 사랑을 해도 ‘내’가 사랑을 하고, 집착도 ‘내’가 하고, 업을 지어도 ‘내’가 업을 짓고, 이러는 겁니다. 여기서 ‘육식의 속박에서’라는 말은 그런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이유가 바로 저런 생각의 흐름, 접촉으로부터 일어나는 심리, 이런 것을 쫙~ 끊어버리는데 있습니다. 끊어버려야 만이 속박에 벗어납니다. 그런 끊어버리는 훈련을 매 순간 순간 하면 말나식이 발견되고, 그게 발견되면 없앨 수가 있습니다. 발견이 안 되는 건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풀이해 보자. “오염된 말나식이 있으므로 무상천에서 무상천의 유정이 항상 아집을 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현자와 성인이 똑같이 무상천의 유정을 꾸지람하고 싫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칠식이 있음으로 무상천에서 아집을 일으키는 것은 중생이기 때문이다. 무상천의 선정을 벗어난 후에 생사에 다시 침몰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니 현자와 성인이 그것을 꾸지람한다는 것이다. 만약 제칠식이 없었다면 그들을 꾸지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허물되는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 색계 제사선정이 중에 한 부분이 무상천입니다. 색계 사선정은 어느 정도의 경지이냐, 참 궁금하죠. 수행을 해서 욕계 삼매에 들면 몸 사라짐 현상이 일어납니다. 몸을 기준으로 안과 밖이 다 사라집니다. 몸만 사라져도 사람들은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착각해서 깨달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아직 아닙니다. 그 다음에 색계 초선정에 들어가면 의식이 머리에 있다가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관찰 대상할 때 일으키는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따라오는 기쁨과 행복감이 오면서 마음의 동요가 없는 부동의 상태가 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초선정의 경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후각과 미각이 사라지고, 시각과 청각과 촉각만 남아있습니다. 선정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인데 제2선정에 가면 그런 청각, 시각, 촉각이 없어집니다. 초선정에 들었을 때는 모기가 앵~ 하고 물어뜯으면 감각이 느껴져서 불쾌감이 느껴지는데 색계 2선정에 가면 그 느낌이 없어집니다. 모기가 아무리 물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럼 아라한의 경지는 어느 정도냐, 멸진정에 가면 칼로 몸을 잘라내도 아픔이 없어요. 제2선정만 가도 모기가 물어도 반응이 없는데, 멸진정은 한참 뒤거든요. 예를 들어, 예쁜 여인이 와서 향수를 몸에 발라준다, 그러면 남자라면 반응을 다 하겠지만, 아라한은 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아라한입니다. 벌써 남녀 사이도 벗어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2선정은 모기 물어도 받아들이는 감각이 사라지고 멸해버려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대상 인식을 하는 거친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제3선정에 들어가면 미세하게 인식하는 마음도 없어져 버리고, 기쁨도 없어지지만 행복감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4선정에 가면 불고불낙,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평정 상태가 오는데 그때 가면 호흡이 끊어지는 현상이 옵니다. 호흡이 끊어졌다는 건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도 없어졌다는 거죠. 이 경지에 가서 체득을 했다면 이 사람은 죽어서 무상천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의식도 작용하지 않는데 사실 말나식은 작용하거든요. 그래서 무상천에 가더라도 아직은 중생이라는 겁니다. 무상천(無想天), 무상정(無想定)을 얻어야만 무상천에 태어납니다. 무상이라는 말은 상이 없다는 말이죠. 그 다음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 있고, 그 다음에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이 있고,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 있고,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이 있습니다. 이게 사공천(四空天)이라 하는데, 이 무상정은 색계 사선정에서 다시 무색계로 갑니다. 무색계는 네 개의 선정이 있습니다.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은 허공을 대상으로 수행을 합니다. 미세한 몸의 반응이나 물질이 완전히 소멸되는 경지입니다. ‘처’는 곳 처(處)자인데 경지를 얘기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면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허공을 인식하는 식이 전 우주를 덮어버리는 식무변처정이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선정이라는 것은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것을 선정이라 그럽니다. 요즘에 우주와 하나 되었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선정을 얻어야 하나가 되든 말든 하지 선정도 얻지 못했는데 어떻게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선정에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한 겁니다. 이런 선정을 통해서 ‘아! 전부 다 마음의 장난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요. 눈에 보이는 이 거 다 가짜입니다. 진짜라고 생각하면 아직 멀은 거죠. 우주를 상정해서 우주와 하나 되었다는 건 우주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거든요. 이렇게 있다고 보는 입장은 아주 수준 낮은 겁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얘기를 아예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정 상태 맛을 한번 보면 그게 아니다하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선정도 이렇게 단계가 굉장히 많아요. 식무변처정에 가게 되면 전부 마음뿐입니다. 모든 게 마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돼요. 그 다음에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은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을 다 놓아버린 상태입니다. 그 다음엔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 이 단계부터는 앞에 멸(滅)자가 들어갑니다. 멸수상정(滅受想定), 수[감각]와 생각이 소멸해 버린 선정입니다. 이때쯤 되면 완전하게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벗어나버리는 겁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가 우주인데, 그 우주라는 것은 전부 다 마음이 만들어놓은 세계구나 이런걸 알게 됩니다. 달나라도, 별나라도, 태양도 모든 것은 마음의 세계이구나. 이 부분은 나중에 아뢰야식 부분에서 더 얘기할 겁니다. 왜 유식을 얘기하면서 우주를 얘기하나 하는데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이 모습 자체가 아뢰야식이기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얘기해야 됩니다. 아무튼 무상천 얘기하다가 저렇게 멀리까지 갔습니다. 그 다음 봅시다. 또 “안으로 ‘나’라고 하는 상에 집착하므로 육식 가운데에 일어나도록 하는 보시 등의 행위에서 ‘나’라고 하는 상(相)이 사라질 수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안으로 나라는 상에 집착한다. 내안에 내라는 상이 있다. 이번에 수련회 할 때 물어봤어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하니까 한 분이 들었어요. 내가 없다는 데에 대해서 설명을 해도 잘 이해를 못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자아관념이라는 것이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잠재되어 있는 놈이라서 뿌리가 잘 안 뽑힙니다. 정말 그분은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결국 자아라고 얘기를 해줘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죠. 감기나 중풍에 걸렸을 때 당신 의지대로 됩디까? 그렇게 물어봤더니 당연히 ‘안 되죠’하면서도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 이게 잘 안 뽑힙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되요. ‘나’의 바깥으로 드러나는 인연은 행상(行相)이 거칠게 움직이므로 제칠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제칠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제육식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행상은 모습입니다. 제칠식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칠식으로 인하여 제육식이 움직이는 거예요. 제육식은 뭡니까, 의식이죠. 제칠식이 있음으로 제육식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것은 온전히 칠식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으로 논(論)에서는 이것을 잘 밝혀 놓았다.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작용하는 건 말나식입니다. 아기가 우유를 잘 안 먹으면, 안고 살살 흔들어주어서 비몽사몽될 때 우유병 꼭지를 물려주면 우유를 잘 먹어요.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 그럴 때 있는 것이 말나식입니다. 뇌사 상태인데 미음을 입에 넣어주면 받아먹는다면 그게 전부 말나식의 작용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