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3. 묘관찰지妙觀察智)

경호... 2011. 8. 24.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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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3) 이것은 중생이 선한 성품과 악한 성품 및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무기의 성품(無記性)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비록 바깥으로 모든 행위를 일으킬지라도 안으로는 항상 나라고 하는 상(相)에 집착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깥으론 온갖 행위를 다 하는데, 속으로는 나라고 하는 생각, 아집이 있는 겁니다. 나라는 상에 집착한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자아관념이 강한 사람은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을 해서 몸에 긴장을 주어 자주 굳어집니다. 이렇게 몸이 굳어지는 것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흙[地]․물[水]․불[火]․바람[風]․허공[空] 중에 흙의 요소가 굳어지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보면 아주 자존심이 강하고, 남을 의식을 잘하고 그렇습니다. 이런 분들은 좀 안된 이야기인데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해서 부부나 자식 간이나 잘 부딪히고, 성생활도 원만하지 못합니다. 자아관념이 너무 강하면 가정파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허공의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 사람은 자아관념이 별로 없어요. 자연이나 사람과의 일체감을 잘 이룹니다. 그래서 남의 시선을 자주 의식하는 자아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명심해야 됩니다. 또 그런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 탐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어깻죽지, 목 이런 곳이 잘 굳어지고 많이 고장 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시면 금방 알 수가 있을 거예요. 안으로 나라고 하는 상에 집착하므로 육식 가운데에 일어나도록 하는 보시 등의 행위에서 나라고 하는 상(相)이 사라질 수가 없다. ‘안으로 나라고하는 상으로 집착하므로...’ ‘상’이라 하는 것은 모습이죠. ‘육식 가운데...’ 육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까지. ‘육식 가운데에 일어나도록 하는 보시 등의 행위에서 나라고 하는 상(相)이 사라질 수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베풀고 하면서도 ‘내’라고 하는 것을 못 벗어나는 겁니다. 보시하는 것은 탐욕을 내려놓기 위해서 하는 것이죠. 탐욕의 이면에 ‘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 ‘내’라고 하는 것을 벗어 놓기 위해서도 보시를 하지만 ‘내’라는 것은 항상 따라 붙는 겁니다. 흙의 요소가 강한 사람 중에 지도자급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인들 보면 나를 굉장히 많이 내세웁니다. 자기 PR을 어떻게라도 한 번 더 하려고 하고, 사람을 만나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은 안 만나고 별 볼일 있는 사람만 만나요. 별 볼일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대중에게 인기 있는 사람들, 자기 지위가 있는 사람들, 사람들 많이 만나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정치인들은 그래야 만이 자기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요. 그래도 나한테는 안 찾아오데요. ㅎㅎㅎ 저는 그게 좋습니다. 나 찾아오면 아주 불편하거든요. ㅎㅎㅎ 이런 게 자아관념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가론』에서 “오염된 말나식은 육식(六識)의 의지처가 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이 바로 이 말나식을 의지한다. 그러니까 항상 시각에도 ‘내’라는 것이 들어가 있고, 청각 속에도 ‘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무엇인가 하면, 수행을 하면 몸에 통증이 일어나고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아픈 건 어디에 속합니까? 촉각에 속합니다. 아프다 보니까 수행을 중단하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아프니까 ‘이거 하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육체를 자기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시각에도 아(我)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남의 시선을 자기가 의식하는 거죠. 청각에도 아(我)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선 음악을 듣더라도 고상한 음악을 들으려고 하죠. 후각, 미각, 촉각도 마찬가지고 의식도 이 말나식에 의지합니다. 그래서 이 여섯 가지 마음은 항상 자아에 물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면서 수행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게 되겠죠. 적어도 다섯 개 감각만 사라져도 자아관념이 많이 사라지는 거죠. 그리고 의식이 사라져버리면 사라진 만큼 자아관념이 그 만큼 사라지는 겁니다. 뿌리는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사라진다하니까 많이 안 좋아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생긴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허상입니다. 그래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전부 아뢰야식 속에 있는 종자에서 발현된 것입니다. 의식도 종자에서 발현되고, 말나식도 아뢰야식 종자에서 발현된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이 죽을 때는 다섯 개의 감각과 의식과 말나식이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다 들어가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는 게 아닙니다. 말나식이 멸하지 않았을 때에는 상(相)을 요별(了別)하는 속박에서 해탈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말나식이 멸했다면 상(相)을 요별하는 속박에서 해탈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굉장한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유식학에서는 잘 이야기 안하는 부분입니다. 종경록의 유식 부분에서 나오는 겁니다. 상을 요별한다는 것은, 요별이 뭡니까, 나누어서 안다, 분별한다는 이야깁니다. 분별하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그중에 의식이 많이 분별을 하죠. 그럼 여기에서 말하는 게 뭔가 하면, 상(相)을 요별하는 속박이라 하는 것은 왜 그런 속박이 일어나느냐. 말나식에 의해서 여섯 개의 마음에 영향을 받아서 대상의 상을 인식하면서 그 상에 속박되는 겁니다. 상을 만드는 것이 말나식(자아의식)이란 겁니다. 그래서 말나식이 소멸해버리면 상을 요별하는 게 없어져버립니다. 왜 그러냐, 아까 이야기했지만 시각 속에 ‘내’가 있고,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 ‘내’가 냄새 맡는다, 맛도 ‘내’가 본다, 몸으로 느끼는 것도 ‘내’가 느낀다, 생각해도 ‘내’가 생각한다, ‘내’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분별해서 대상을 인식하니까. 그렇지만 자아관념에 거꾸로 빠지면 ‘내’라는 관점에서 대상을 인식하겠느냐? 인식 안 합니다. 대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거죠. 만일 남이 나를 비난 했을 때 ‘내’라는 자아가 없으니까 비난을 받아도 동요가 없는 겁니다. 동요가 없으니까 오히려 상대를 연민심으로 바라본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나에게 영향을 받은 여섯 개의 마음은 어찌 되느냐, 상대방이 나에게 비난을 했다, ‘이럴 수가 있나?’화가 치미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는 ‘내’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곤란한 거죠. 그래서 대상을 요별한다, 대상을 인식한다는 얘기죠. 대부분 우리는 이 속에 살잖아요? 이러한 자아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한 방편으로,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남하고 평등하게 생각하고, 전생의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라, 이렇게 얘기하죠. 그래서 상을 요별하는 속박에서 해탈한다는 말이 말나식이 멸했을 때 하는 얘깁니다. 여기서 상을 요별하는 속박이라는 것은 경계로 나타나는 모습에서 이것이 환(幻) 같은 것임을 요달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림을 그려볼게요. 자아의식(말나식)이 있습니다. 이놈이 의식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영향을 줍니다. ‘내’라 하는 것이 항상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내’가 들어가 있으니까 부딪히는 대상마다 반응을 하는 거죠. 그래서 반응하는 대상을 인식하는데, 인식하는 내용들이 전부 다 상[모양]입니다. 모양에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나식이 소멸해버리면 대상인식 하는 상을 요별 안 하는 겁니다. 인식을 안 한다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서 그리 되느냐? 수행 주체는 의식인데, 이게 남이 되어가지고 대상을 인식하면 대상이 환인 줄 아는 거예요. 환인 줄 알면 자아의식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의식이 관하는 이것이 묘관찰지로 변한다, 묘관찰지로 변하면 이 자아의식은 평등성지로 변합니다. 평등이란 말이 들어가 있어요. 자아는 불평등인데, 의식이 묘관찰지로 전환되면서, 말나식 중에서 아견이 사라지면서 평등성지가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세계가 환, 실제의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이거죠. 대상을 환으로 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건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환 같은 것을 요달하면, 깨달으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식주관인 견분(見分)과 인식대상인 상분(相分)으로 구속되어 자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相)을 요별하는 속박이라 한다. 주관도 환이고 객관도 환인데, 환인 줄 모르고 찍고 까불고 난리 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게 환인 줄 알면 여기서 벗어나는 겁니다. 환인 줄 아는 건 뭡니까? 명상 수행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수행을 해야 되는 거죠. 수행을 해가지고 자기 몸도 환이고, 보이는 세계도 환이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물질이나 형상에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자유로워지는 거죠. 이 말나식이라는 것이 갑자기 뿌리가 뽑혀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수행을 하면 말나식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멈추게 하는 겁니다. 자아관념 기능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대상을 인식할 때, 자기 몸을 관찰하든 마음을 관찰하든지 실체가 없는, 자아가 없는, 무아가 없는 것을 관찰해야 해요. 그러면 말나식이 힘을 잃어버리는 거죠. 그럼 최종적으로 말나식이 평등성지로 변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게 의식이 하는 일이에요. 그 의식도 묘관찰지로 바뀌는 거죠. 우리는 보통 선정에서 의식은 죽일 놈이라고 말을 하는데, 말은 맞기는 맞아요. 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통해서 깨닫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 의식 속에는 자성청정심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도 그렇고, 말나식 속에도 그렇고, 아뢰야식 속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식이 묘관찰지로 전환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화두참구 하는 것도 의식입니다. 몸과 마음 관찰하는 것도 의식이고, 사유하는 것도 의식입니다. 그러니 이 의식을 통해서 깨달음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됩니다.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