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5. 말나식의 바탕은 참성품이다)

경호... 2011. 8. 24.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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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5) 제육식 가운데에서 ‘나’라고 집착하는 바탕은 육식(六識)이 활동하는 사이사이에 끊어지는 것이 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및 무기성(無記性)의 마음에 통하면서도 이것들 사이사이에서 섞이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칠식이 바깥 경계를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무슨 말인가 하면 육식 가운데는 말하고 싶어 하는 바탕이 계속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제칠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안쪽으로 향해서 ‘내다’이러는 건데 이것이 제육식[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식]에 영향을 주기는 줍니다. 그렇지만 이 ‘내’라고 하는 게 중간 중간 끊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참회를 쭈욱~ 하다가 자연과 자기가 하나가 되는 체험도 하는 거예요. 이런 체험은 육식 상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말나식이 작용을 안 하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겁니다. ‘내’라는 생각이 일어나면 갈라져 버려서 일체감을 이루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각상이나 청각상이나 내지 의식상에서 일어나는 자아라 하는 것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라고 하는 생각에는 반드시 윤리적인 것이 같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행위를 한다, ‘내’가 악한 행위를 한다, 이런 게 있거든요. 무주상보시를 하면서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 있죠. 한 20여 년 전인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부자 보살이 불국사에 가서 돈을 한 뭉태기 가져가서 불전함 앞에 갖다 놓는 거예요. 그런데 슬그머니 아무데나 놓아도 되는데, 으스대는 마음으로 소리가 탁! 나게 놓는 겁니다. 무언중에 ‘제가 이거 놓습니다.’이렇게 드러내고 싶어 하는 거죠. 성철스님의 일화에도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스님이 어느 절에 갔는데 대웅전 문 간판 옆에 뭐가 붙여져 있어서 “저게 뭐냐”고 물으니까 “법당을 지을 때 시주한 시주자 이름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철스님이 “그 사람 좀 오라”고 했어요. 큰스님이 오라고 하니까 시주자가 왔는데 성철스님 하시는 말씀이 “저거 뭡니까?”하니까, “아! 제가 시주해서 그런 겁니다.”하고 말씀드리니까 “이왕 알릴 거 만천하에 알리는 게 좋지 왜 여기다 이렇게 조그마하게 붙여놨느냐, 아예 절 앞에 크게 이름을 붙여서 광고를 하지.” 그런 일화가 있었죠. 그래서 시주 하는 사람도 안 드러내고 하면 좋은데 자기를 드러내는 건 의식상으로는 억제하더라도 말나식 때문이거든요. 이번에 자비선사 요사체하고 식당을 짓는데 보시를 낼만한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몇 분이 냈어요. 거금을 냈는데도 한결같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절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이런 분이 계셨어요. 그런 분은 공부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기를 안 밝혔음 좋겠다고 하는 거죠. 그게 공부가 되었다는 거예요. 위에서 간략하게 기록한 제칠식 말나식은 모든 가르침에서 똑같이 설명하는 것이며 많은 현자가 함께 풀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도(道)에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의(意)를 밝혀야 한다. 이것은 범부와 성인이 되는 근본 원인으로 마땅히 그 바탕의 참성품을 궁구해야 한다. 셋째 줄에 의(意)는 말나식이죠. 말나식은 처음부터 바로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제일 먼저 전환되는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이 전환이 되면서 제 칠 말나식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제 칠 말나식 중에 아견이 제일 먼저 사라지고 평등성지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게 초지의 경지입니다. 진여자리에 들어가는 자립니다. 나아가 의혹을 푸는 근본을 세우는 것으로 마땅히 그 근원을 궁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미혹하면 나와 대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된다. 그러나 깨달으면 평등한 성품의 지혜를 이룬다. 둘째 줄에 근원은 말나식이 근원이죠. ‘깨달으면 평등한 성품의 지혜’, 바로 평등성지이죠.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무얼 말하느냐, 말나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얘기하죠. 그래서 진리라 하는 것이 무아, 공인 줄 확실하게 알면 자아가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자아가 꺾이면서 제칠 말나식이 평등성지의 지혜로 바뀐다 이런 얘깁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평등한 성품의 지혜를 이룬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말나식이 모든 식 가운데에서 유독 의(意)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루법 가운데에서 무명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활동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아 무상정(無想定)으로 다스려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말나식은 오염의 근원이기 때문에 무명의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무명은 아뢰야식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무명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오염의 근원이기 때문에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무상정으로 다스려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색계 사선정에 가도 이런 것은 안 사라진다는 거예요. 항상 살피고 사량하는 것으로 사공천(四空天)에서는 비켜 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비록 진실 된 삶의 흐름을 덮으나 선과 악의 시비로 현행되지 않는다. 사공천(四空天)은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유상비무상처정을 말 합니다. 말나식이라는 것이 무색계의 선정을 얻어도 자아관념을 끊기 어려운 거예요. 식무변처정, 공무변처정 하면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전부 텅 비어있어요. 텅 비어있으면 늘 일체감을 이루고 살건데도 자아관념이 있는 거예요. ‘내’라 하는 게 있다면 아직 완전한 게 아닙니다. 이 우주 자체가 아뢰야식이거든요. ‘비록 진실 된 삶의 흐름을 덮으나 선과 악의 시비로 현행되지 않는다.’ 진실 된 삶을 덮었다, 유부라 그럽니다. 덮이긴 덮였는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유부무기성이라 그럽니다. 진실한 삶을 자아로 덮기는 덮지만은 선이나 악으로 만나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선과 악의 시비로 현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 하는 겁니다. 여기서 무상천은 소광천(少廣天)이나 복덕천(福德天)이라고도 합니다. 물질은 아직 있지만 상은 없어요. 바깥 경계를 집착하지 않으나 안으로 제팔식의 견분(見分)을 반연하여 항상 현행해서 진여를 가리고 도를 장애할 수 있다. 무아와 공을 진여라 합니다. 제팔식(아뢰야식)을 반연하면서 ‘내’라고 자꾸 하니까 진여인 무아를 가리게 되죠. ‘도를 장애할 수 있다’는 건 수행을 방해한다는 겁니다. 모든 식 가운데서도 항상 오직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말나식 만의 특성으로[不共], 이 말나가 모든 생각을 물들이는 의지처가 되면서 단지 오염된 법만을 이루어 생사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생각에 물든 의지처가 된다는 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이 늘 말나식의 영향을 받는다는 거죠. 예를 들어가지고 탁 때리면 아픔이 옵니다. 이 아픔도 ‘내’가 아프다는 ‘내’가 들어가 있어요. 아픈 느낌이 촉각인데, ‘내’라는 말나식이 작용 하는 겁니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저절로 시선이 다른 데로 돌아가잖아요. 그것도 무엇인가 하면, ‘내’가 기분이 나쁘다 이거죠. 전부 다 이게 말나식의 작용입니다. 의식상으로 하는 거 같은데도 그렇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생사에 빠지게 한다는 거죠. 이런 까닭에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면 모름지기 요긴한 공부 길을 알아야 한다. 신통한 묘약을 베풀려면 먼저 병의 원인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세밀하게 살피면서 고요한 마음으로 관찰한다면 어떤 번뇌에선들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어떤 병인들 치료하지 못하겠는가. 미혹을 끊는 방편문에 이것이 가장 요점이 된다. ‘병의 원인’은 말나식을 말합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선정을 의지해서 관찰해야 한다는 얘기죠. 그래야 말나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미혹을 끊는 방편문에서 가장 요점이 되는 것은 바로 근본 원인을 해부하는 것입니다. 선정에 의지해서 관찰하면 된다. 그러면 선정에 의지해서 관찰할 정도면 어느 정도 가야 되느냐. 기본적으로 몸이 사라져서 몸 삼매를 얻어야 되요. 그래서 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 의식을 또 계속 관찰하면 온간 번뇌가 쏟아져 나오죠. 그런 상태에서 의식 자체가 공함을 봐야 해요. 그래서 공을 직관하게 되면 선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선정에 의지해서 다시 의식을 관찰해 들어가고, 다른 부수적인 심리나 마음 현상을 관찰해 들어가는 거예요. 관찰해 들어가면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여기서 사유가 필요합니다. 선정에 의지해서 공을 철저하게 난도질해서 의심을 다 없앱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선정에 의지한 사유는 반드시 무분별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직관으로 가는 거죠. 철저하게 공을 분석해가지고 사유하고 나면 무분별의 상태가 되요. 이 무분별의 직관을 다시 성지(聖智)의 세계로 들어가면 견도위(見道位), 깨달음을 얻는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칠 말나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견(我見)·아치(我癡)·아애(我愛)·아만(我慢) 중에서 아견만 소멸해도 초지에 들어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