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2. 말나식이 있기에 허물이 있다)

경호... 2011. 8. 24. 01:24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강의 - 2) 자, 말나식은 무엇인가? 이게 어떤 것인가? : 만약 말나식이 없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이 말은 뒤집어보면 무슨 말입니까? 말나식이 있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는 거죠. : 만약 제칠식이 없다면 범부라고 싫어할 것도 없고 성인이라 좋아할 것도 없다. 뒤집으면 범부나 성인은 제칠 말나식 때문입니다. 제칠 말나식이 있으니까 범부고, 제칠 말나식이 사라지니까 성인이다 이 말 입니다. 범부와 성인으로 성립하지 않으니 더럽고 깨끗한 법이 설 자리를 모두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이런 까닭에 반드시 의(意)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의(意)는 말나식을 이야기합니다. 의란 것은 의식과 대비되죠. 식은 알 식자를 말하는데,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식이라고 합니다. 제7 말나식은 의(意)라 하고 제6 의식은 의식(意識)이죠. 글자 한 자 차이잖아요. 제6 의식에서 식은 제 생각인데 아마 구분을 하기 위해서 그럴 겁니다. 의식하는 것은 쉽게 말해가지고 드러난 의식, 표층의식입니다. 의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의식, 심층의식입니다. 잠재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작용을 하는 것은 의식인데, 의(意)는 자체가 작용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 식이 빠져있지 않나, 제가 보는 견해가 그렇다는 겁니다. 식이 빠진 것은 마치 인식을 하더라도 잠자는 것 같이 인식 하기 때문에 식을 빼놓고 의만 말하지 않나. ‘더럽고 깨끗한 법이 설 자리가 없다.’ 제7식이 정화되면 깨끗한 법이 되고, 정화가 안 되면 더러운 법이죠. 법이라는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기는 겁니다. 선행이나 악행이나 하면 선행은 깨끗한 선법이고 악행은 나쁜 법이죠. 말나식이 그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이런 까닭에 반드시 의가 있어야 한다."’ 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더럽고 깨끗한 법은 모두 의에서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말나식에 의해서 더러운 법과 깨끗한 법이 나온다는 겁니다. 또 계경(契經)에서 “무상천(無想天)의 유정(有情)으로서 일정 기간 무상천에 있을 때에는 심심소(心心所)가 멸하는 것이다. 무상천은 생각이 없는 하늘이죠. 그래서 색계 사선정도 무상천이고,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도 사실은 죽으면 무상천에 태어나는 거죠. 무상천은 생각이 없는 천당이죠. 심심소가 멸하다, 없다는 것은 의식과 의식의 작용이 없는 천당입니다. 이런 천당에 가려면 시간이 걸리겠죠. 제일 밑에는 욕계가 있습니다. 욕계라 하는 것은 잘 알다시피 오욕락이 있는 욕심의 세계입니다. 그 위에는 물질의 세계인 색계가 있습니다. 색계 위에는 물질이 없고 정신만 있는 무색계가 있습니다. 무색계 위에는 천당이 있습니다. 색계도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넷으로 나눕니다. 수행을 계속 하면 욕계삼매에 듭니다. 욕계삼매는 몸이 사라지는 경계입니다. 쉽게 말해서 오욕락은 몸뚱아리가 살립니다. 이 몸뚱어리가 다 소멸하면서 욕계의 최정상에 올라가는 거죠. 욕계에도 하늘이 여섯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 보리천 같은 경우에는 그 안에 33개의 천당이 또 있답니다. 그러니까 몸이 소멸하는 것은 범부의 깨달음인데 그 정도만 가드라도 천당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을 더 하면 초선정에서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까지 가는데 무상정을 성취하면 무상천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무색계에도 네 개가 있어요.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유상비무상처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소유처정이 무상정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색계 사선하고 무색계 무소유처정이 무상정입니다. 여기 상이 없다는 거죠. 그렇지만 여기도 보면 무상정이 있습니다. 비상비비상처정에 가면 그 의식과 의식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심리가 없어집니다. 무색계에도 네 개의 천당이 있는데, 범부의 처정을 얻었으면 공처정의 천당이 튀어나오고, 식무변처정을 얻으면 바로 죽어서 마음만 있는 세계. 무소유처정은 그 뒤에 쫓아오고요. 그런데 이 무상천이란 말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상정을 이렇게 이야기해도 잘 이해가 안 되죠? 이것은 설명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라서 하나 더 얘기하겠습니다. 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접촉을 이야기합니다. 총각이 길을 가다가 처녀를 만나서 실컷 봤다, 접촉입니다. 한 발짝 내딛고 지나가는 순간 좋은 느낌이 온다, 이게 수입니다. 좋은 느낌이 뭐냐 하면 작의, 뜻을 짓는다. 아뢰야식 속에 종자가 있는데 이 종자가 발현되어 가지고 자기 뜻을 펴면 종자에 있는 것을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감각으로 오는 것이죠. 그러면서 좋은 종자가 튀어나오면서 그 처녀에게 좋은 인상[느낌]을 받습니다. 좋은 느낌을 받는 순간 한발 탁 디디니까 좋은 이미지가 생깁니다. 이게 상이에요. 좋은 이미지가 생기니까 그 다음에 선악의 생각이 일어나고 그 처녀랑 결혼해야겠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게 일반적으로 심리가 일어나는 과정인데 눈으로 보든지, 몸으로 접촉하든지 하면 촉, 작의, 수, 상, 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얘기 참 많이 했죠. 총각이 저녁에 산책하기 위해 길을 걷는데 맞은편에 웬 처녀가 걸어옵니다. 바라보면 접촉이고, 마음 동요가 일어남과 동시에 좋은 느낌을 받으면서 한 발짝 디디는 순간 처녀는 지나갔는데 그 아름다운 얼굴이 탁 떠오르는 거예요. 그게 생각 상이예요. 그 다음 한 발짝 내디디니까 벌써 결혼식을 올리는 상상을 합니다. 그러면 생각 상과 생각 사가 나왔죠. 그러니까 생각 상은 지나간 일이고, 생각 사는 미래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불이 붙으면 어찌 됩니까? 상사병이 되는 겁니다. 두 발짝 만에 상사병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되돌아가서 말을 걸죠. 말을 걸 때 얼굴을 살피고, 말하는 맵시라든지 잘 살피죠. 살피면서 데이트를 하기로 하고 기분이 좋아 집에 돌아가는데, 마침 출가한 삼촌[스님]이 집에 와 계시는 겁니다. 스님이 이야기하는 불법을 듣다 보니까 마음의 깨우침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서 비법을 전수받았는데 탁 앉자마자 삼매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들어갔냐면 무상정에 들어가 버린 겁니다. 그걸 다 체험하고 그 다음날 약속대로 처녀를 만납니다. 어제 만났을 때는 너무 좋았는데, 무상정을 경험하고부터는 그 처녀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삼촌 스님을 만나가지고 마음이 바뀌어 버린 거죠.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심심소에서 심은 심왕을 얘기하는 것이고 심소는 신왕을 얘기하는 겁니다. 심왕에는 여덟 개의 마음이 있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말나식이라는 일곱 개 왕과 아뢰야식이라는 왕이 있는데 여덟 개 왕은 각각 맡은 분야가 달라요. 그렇게 부차적으로 일어나는 심리들은 신하에 속합니다. 그걸 심소라 합니다. 왕과 신하가 다 소멸했다는 건 마음이 다 소멸했다는 거죠. 만약 제칠식이 없다면 무상천의 유정은 오염된 법에 물드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제칠식이 없다면 어찌 되느냐. 무상천에 사는 유정은 중생이죠. 완전 깨달음을 이룬 게 아니에요. 의식과 의식의 심리 작용만 없어진 것뿐이죠. 무상천에 있는 중생들은 거기에 태어나도 다른 선인들이 싫어하는 거예요. 왜 싫어하느냐 하면, 의식 작용도 없고 의식에 붙어있는 심리도 없는데 자아의식인 말나식이 없어지지 않아서 지가 잘났다고 자꾸 우기는 거죠. 그러니까 비상비비상처정에 가드라도 의식은 없을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대승에서 하는 얘기죠.) 자아의식 말나식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 꼬라지를 들어내니까 무상천에 있는 선인들이 중생들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무상(無想)할 때 상(想)이 사라져 버리면 이미지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든 나쁜 이미지든 이미지가 없습니다. 그러고 처(處)까지 없어지면 멸진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뭘 보고나 들으면 촉, 작의, 수, 상, 사가 탁 일어나는데 아까 총각처럼 무상정에 들어가면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탁 쳐다보고 어제 분명히 좋은 이미지, 그리고 미래의 이미지까지 떠오르지만 무상정에 들어가 이게 없어지니까 밑에 있는 생각 사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녀를 봐도 무덤덤하니 아무런 동요가 안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무상천의 유정이 오랜 세월 육전식(六轉識)의 작용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육전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을 말하는데 그런 게 다 사라진 거예요. 그렇지만 말나식은 남아 있다는 겁니다. 외도들이 이 무상천에 머물면서 깨달았다고 많이 착각을 합니다. 여기에 말나식인 의(意)가 없다면 아집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리 오염된 말나식이 있어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염된 말나식이 있으므로 무상천에서 무상천의 유정이 항상 아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자와 성인이 똑같이 무상천의 유정을 꾸지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아직 그러지 마라!’ 자꾸 이렇게 얘기 하는 거죠. 의식은 없지만, 말나식이 남아 있어 자꾸 아집으로 이러니까 선인들이 싫어하는 겁니다. 이유가 거기 있는 거죠. 보통 외도들은 이 무상정에 많이 들고 불자들은 대개 멸상정에 많이 들어요. 그렇지만 진실한 수행자는 멸진정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들어가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그래서 무상정에 들어가면 아집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런 얘깁니다. 보통 힌두교 선인들이라고 지칭하는 자들은 대개 무상정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불교계 선인들이 아집 부리는 힌두교 선인들을 싫어하는 겁니다. 힌두교에서는 선인일지 모르지만 불교에서 봤을 때는 범부 중생입니다. 또 계경에서는 “중생이 좋은 마음이나 나쁜 마음, 또는 무기의 마음(無記)에 있을 때에 항상 아집이 붙어 다닌다. 만약 말나식이 없었다면 중생의 아집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무기의 마음(無記)은 좋은 마음도 나쁜 마음도 아닌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이나 나쁜 마음이나,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말나식이 항상 따라붙는 겁니다. 그러니 아집이 있다는 거죠. 쉽게 얘기해가지고 의식상에서 존심, 자존심 자꾸 내세우고 고집 피우고 이런 것은 전부다 말나식이 영향을 줘서 아집을 피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집이라는 것도 개인의 아집이 있지만, 집단의 아집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개인의 아집이라는 것은 잘 알죠? 존심 세우기 위해서 고집 피우는 것은 누구나 있죠. 집단의 아집은 이렇습니다.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가문을 내세워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집단의 아집입니다. 학교 출신, 종교, 국가도 마찬가지로 집단 자아입니다. 한국이란 자아와 탈레반이란 자아가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자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벌써 탈레반들이 23명이라는 한국인을 억류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없는 사람들은 평화주의자입니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뿐더러 말썽도 피우지 않습니다. 23명이라는 단체도 자아가 있습니다. 선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고 하는 것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집단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억류당하고 그런 겁니다. 이런 게 집단 자아에서 비롯되는 거죠. 왜 그런가? '나'를 내세우면 뭐가 생깁니까, '너'가 생기는 거죠. 내가 생기면 네가 생기기 때문에 대립이 생기고, 음해한다든지 방해한다든지 그러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러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전부 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아의식인 말나식 사량식은 표면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억류된 사람 중에서 지독한 공포심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풀려나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길 겁니다. 이게 자아의식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만일 그 억류자 중에서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억류 돼 있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몸은 포동포동 살이 찔 겁니다.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기독교는 명상이 없기 때문에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이는 이고, 눈은 눈이고, 칼은 칼이에요. 그게 문제예요. 이슬람도 그렇거든요. 자기네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유일신! 유(有)가 있을 유자, 자아입니다. 있을 유자가 들어 있는 것은 전부다 어느 순간만 가면 사람이 돌변해 버립니다. 자아관념이 있는 사람은 그런 거예요. 종교도 그렇다는 겁니다. 자아관념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심리적으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아이인데 그림을 그렸어요.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 태권로봇을 그린대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이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늘 불안한 거예요. 불안하니까 그림을 그려도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전사를 그리든지 태권 로봇을 그리든지 하는 겁니다. 이런 아이는 정서 불안이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자아관념과 관련 있습니다. 아이도 자존심이 있거든요. 여러분도 생각해봐야 됩니다. 이게 전부 말나식에서 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