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본문)

경호... 2011. 8. 24.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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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말나식(末那識)은 무엇인가 - (본문) 52-8-177 問 若無末那 有何等過. 答 若無第七 則無凡可厭 無聖可欣. 凡聖不成 染淨俱失. 論云 是故定應別有此意. 又 契經說 無想有情 一期生中 心心所滅. 若無此識 彼應無染. 謂彼長時 無六轉識. 若無此意 我執便無. 乃至 故應別有染汚末那. 於無想天 恆起我執. 由斯賢聖 同訶厭彼. 又 契經說 異生善染無記心時 恆帶我執. 若無此識 彼不應有. : 만약 말나식이 없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 만약 제칠식이 없다면 범부라고 싫어할 것도 없고 성인이라 좋아할 것도 없다. 범부와 성인으로 성립하지 않으니 더럽고 깨끗한 법이 설 자리를 모두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이런 까닭에 반드시 의(意)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계경(契經)에서 “무상천(無想天)의 유정(有情)으로서 일정 기간 무상천에 있을 때에는 심심소(心心所)가 멸하는 것이다. 만약 제칠식이 없다면 무상천의 유정은 오염된 법에 물드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상천의 유정이 오랜 세월 육전식(六轉識)의 작용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말나식인 의(意)가 없다면 아집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리 오염된 말나식이 있어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염된 말나식이 있으므로 무상천에서 무상천의 유정이 항상 아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자와 성인이 똑같이 무상천의 유정을 꾸지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또 계경에서는 “중생이 좋은 마음이나 나쁜 마음, 또는 무기의 마음(無記)에 있을 때에 항상 아집이 붙어 다닌다. 만약 말나식이 없었다면 중생의 아집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謂異生類 三性心時 雖外起諸業 而內恆執我. 內執我故 令六識中所起施等 不能亡相. 故瑜伽說 染汚末那 爲識依止. 彼未滅時 相了別縛 不得解脫 末那滅已 相縛解脫. 言相縛者 謂於境相 不能了達如幻事等1). 由斯見分相分所拘 不得自在. 故名相縛. 依如是義 有伽陀言.2) 이것은 중생이 선한 성품과 악한 성품 및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무기의 성품(無記性)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비록 바깥으로 모든 행위를 일으킬지라도 안으로는 항상 나라고 하는 상(相)에 집착한다는 것을 말한다. 안으로 나라고 하는 상에 집착하므로 육식 가운데에 일어나도록 하는 보시 등의 행위에서 나라고 하는 상(相)이 사라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유가론』에서 “오염된 말나식은 육식(六識)의 의지처가 된다. 말나식이 멸하지 않았을 때에는 상(相)을 요별(了別)하는 속박에서 해탈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말나식이 멸했다면 상(相)을 요별하는 속박에서 해탈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상을 요별하는 속박이라는 것은 경계로 나타나는 모습에서 이것이 환(幻) 같은 것임을 요달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식주관인 견분(見分)과 인식대상인 상분(相分)으로 구속되어 자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相)을 요별하는 속박이라 한다. 이와 같은 뜻에 의지하여 지어진 게송이 있다. 如是染汚意 是識之所依 此意未滅時 識縛終不脫. 釋云. 於無想天 恆起我執 由斯賢聖同訶厭彼者. 有第七 於彼起我執 是異生故. 出定已後 復沈生死 起諸煩惱 聖賢訶彼. 若無第七 不應訶彼. 無過失果. 由執我故 令六識中 所起施等 不能亡相者. 此我外緣 行相麤動 非第七起. 由第七故 第六起此. 全由七生 增明爲論. 이와 같이 오염된 말나식이란 요별하는 육식의 의지처이니 제칠식이 멸하지 않을 때에는 육식의 속박에서 못 벗어나네. 이것을 풀이해 보자. “오염된 말나식이 있으므로 무상천에서 무상천의 유정이 항상 아집을 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현자와 성인이 똑같이 무상천의 유정을 꾸지람하고 싫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칠식이 있음으로 무상천에서 아집을 일으키는 것은 중생이기 때문이다. 무상천의 선정을 벗어난 후에 생사에 다시 침몰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니 현자와 성인이 그것을 꾸지람한다는 것이다. 만약 제칠식이 없었다면 그들을 꾸지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허물되는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 또 “안으로 ‘나’라고 하는 상에 집착하므로 육식 가운데에 일어나도록 하는 보시 등의 행위에서 ‘나’라고 하는 상(相)이 사라질 수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바깥으로 드러나는 인연은 행상(行相)이 거칠게 움직이므로 제칠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제칠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제육식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온전히 칠식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으로 논(論)에서는 이것을 잘 밝혀 놓았다. 第六識中 我執體有間斷. 通三性心 間雜生故. 第七不緣外境生故. 已上略錄 第七末那 諸敎同詮 群賢共釋. 創入道者 此意須明. 是起凡聖之因 宜窮體性. 乃立解惑之本 可究根原. 迷之則 爲人法執之愚. 悟之則 成平等性之智. 於諸識內 獨得意名 向有漏中 作無明主. 不間不斷 無想定治而不消. 常審常恆 四空天避而還起. 雖有覆而無記. 제육식 가운데에서 ‘나’라고 집착하는 바탕은 육식(六識)이 활동하는 사이사이에 끊어지는 것이 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및 무기성(無記性)의 마음에 통하면서도 이것들 사이사이에서 섞이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칠식이 바깥 경계를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기록한 제칠식 말나식은 모든 가르침에서 똑같이 설명하는 것이며 많은 현자가 함께 풀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도(道)에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의(意)를 밝혀야 한다. 이것은 범부와 성인이 되는 근본 원인으로 마땅히 그 바탕의 참성품을 궁구해야 한다. 나아가 의혹을 푸는 근본을 세우는 것으로 마땅히 그 근원을 궁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미혹하면 나와 대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된다. 그러나 깨달으면 평등한 성품의 지혜를 이룬다. 말나식이 모든 식 가운데에서 유독 의(意)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루법 가운데에서 무명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활동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아 무상정(無想定)으로 다스려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항상 살피고 사량하는 것으로 사공천(四空天)에서는 비켜 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비록 진실 된 삶의 흐름을 덮으나 선과 악의 시비로 현행되지 않는다. 不外執而內緣 常起現行 能蔽眞而障道. 唯稱不共 但成染而潤生. 是以 欲透塵勞 須知要徑. 將施妙藥 先候病原. 若細意推尋 冥心體察 則何塵而不出 何病而不消. 斷惑之門 斯爲要矣. 바깥 경계를 집착하지 않으나 안으로 제팔식의 견분(見分)을 반연하여 항상 현행해서 진여를 가리고 도를 장애할 수 있다. 모든 식 가운데서도 항상 오직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말나식 만의 특성으로[不共], 이 말나가 모든 생각을 물들이는 의지처가 되면서 단지 오염된 법만을 이루어 생사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면 모름지기 요긴한 공부 길을 알아야 한다. 신통한 묘약을 베풀려면 먼저 병의 원인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세밀하게 살피면서 고요한 마음으로 관찰한다면 어떤 번뇌에선들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어떤 병인들 치료하지 못하겠는가. 미혹을 끊는 방편문에 이것이 가장 요점이 된다.
    註釋┠─────────────────────────────────────────
      1) 謂於境相 不能了達如幻事等은 K본과 C본은 같으나 S본은 調於境相으로 되어 있다. 본문으로... 2) 원시불교 경전의 기본적인 형태인 십이부경(十二部經)의 하나로 운문(韻文)의 형식을 취한 경문을 말한다. 산문형식의 경문의 의미를 거듭 설하는 게송과 구별하여 고기송(孤起頌)이나 불중송게(不重頌偈) 등으로도 번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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