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제칠식(第七識)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 (강의 - 5. 원성실성圓成實性)

경호... 2011. 8. 24.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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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제칠식(第七識)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 (강의 - 5) 비유하면 거울 속의 영상 같아서 종자가 나타나 움직여 보여 어리석은 사람은 미혹당하니 밝은 지혜 지닌 자가 아니로구나. 밝은 지혜 지닌 자는 절대로 안 속는다는 거죠. 여러분들은 잘 속죠? 집에 가서 남편이 말 한마디 하면 폭발하는 사람 있죠. 아내가 말 한마디 하면 남편이 화를 내고 이러잖아요. 그게 다 그림자인데, 진짜 있는 것처럼 속아서 화를 내는 겁니다. 종자라는 것은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있는 종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거 다 저장된다고 했죠. 요즘 말로 하면 바로 정보입니다. 저장되어 있던 정보와 맞는 대상과 만나면 탁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대상의 이미지라는 것이 정보가 발현 되서 나타나는 겁니다. 마음, 지수화풍 4대가 물감으로 만들어 칠한다고 하는데 이 지수화풍 4대도 정보입니다. 마음속에 저장 되어있는 정보에요. 그게 튀어나와서 모양과 색깔을 구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밝은 지혜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거울 속에 영상과 같다는 겁니다. '오직 마음뿐, 다른 경계는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다 허상이라는 거죠. 마음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결론적인 얘기는 그 얘기입니다. 어진 이 부처님은 응당 아시니 이 세 가지1) 모두가 식의 드러남. 이 자리서 멀리멀리 벗어나면은 이것이 원성실성 부처님 경계. 자! 여기에서 세 가지가 뭘 얘기하는가 하면, 『주석 1』에서 근신(根身)과 기계(器界), 종자(種子)라고 얘기 했죠. 근신(根身)이라는 것은 몸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기계(器界)라는 것은 보이는 자연계를 얘기합니다. 종자(種子)라는 것은 마음에 저장된 정보를 말합니다. 정보가 발현되면서 몸과 이 세계를 나타내는 겁니다. 세 가지가 전부 다 식(識)이죠. 몸도 아뢰야식의 부분이고, 자연계도 아뢰야식의 부분이고, 종자도 아뢰야식의 부분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원성실성 부처님 경계’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원성실성이란 말은 진여를 원성실성이라고 그럽니다. 유식에서 사물을 보는데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이 의타기성입니다. 의타기성은 식을 이야기하고, 변계소집성은 상을 이야기하고, 원성실성은 진여를 얘기합니다. 우리 마음은 절대로 혼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상이 있음으로 내 마음이 저것이 무엇이다 라고 하는 거죠. 촉각이든, 시각이든, 청각이든, 후각이든, 미각이든, 전부 다 대상이 있으므로 감각이 일어나고, 그 대상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것도 의식이 하죠. 말나식도 대상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겁니다. 아뢰야식도 대상입니다. 아뢰야식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몸을 인식하고, 자연계를 인식하고, 마음 저장 정보도 인식하는 게 아뢰야식입니다. 그래서 여덟 개(전오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의 마음이 전부 다 혼자서 작용하는 게 아니고 대상이 있음으로써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타(他)에 의해서 일어나는 성품이에요. 의타기성은 타에 의해 일어나는 성품인데, ‘저기 있다.’, ‘저기 없다.’, ‘야! 저거 멋있다.’, ‘가지고 싶다.’라는 것은 유(有)를 근거로 하는 거거든요. 그것을 의타기성 속에 작용하는 변계소집성, ‘집착하는 바의 성품’이라는 겁니다. 대상에 집착하는 거죠. 있다[有]고 집착하니까 그것을 근거로 모습이 나타나죠. 그런데 의타기성 속에서 작용하는 변계소집성을 공부를 해보니까 ‘찻잔이 있다고 하는데 있는 게 아니고 지수화풍 4대가 화합해서 있는 거구나.’이렇게 알면 찻잔을 바라볼 때 있을 유(有), 형상을 보지 않는 거죠. 형상을 보지 않으면 저 찻잔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명확하게 알고 그렇게 꿰뚫어 보는 겁니다. 그럴 때 원성실성인 진여을 본다고 합니다. 의타기성 속에 변계소집성을 없애 버리면 의타기성이 그대로 원성실성인 진여다. 비유를 들어서 많이 얘기를 하죠. 길을 가다가 새끼를 보고 뱀으로 착각했다. 그러면 착각한 뱀은 착각한 사람이 있으면, 있습니다. 그게 변계소집성입니다. 실제로 자세히 보니까 새끼로 꼬아져 있는데, 그걸 새끼로 봐 버리면 뱀으로 착각한 변계소집성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새끼를 보지 못하는 한에서는 진짜 확인해보지 않고, 그래도 뱀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원래 뱀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마음이 그려놓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언젠가 구미 불교대학에 가서 사담시간에 얘기를 했더니만,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스님 그러면 말이죠. 이 세계가 환영에 지나지 않으면 얼마나 허전합니까? 뭐가 있어야 악착같이 사는데 그런 게 없으면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둥바둥 집착해가면서 사는 것보다는 허전한 게 훨씬 마음 편안하고 좋다.” 경허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느 청년이 찾아와서 “인생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 세상은 연극과 같다. 네가 연극의 주인공처럼 살아라.” 연극의 주인공처럼 살면 날고 기고 자기 맘대로 다 하잖아요. 그런데 이 세계는 연극이 아니고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면 악바리처럼 살아야 합니다. 훔치고, 쟁취하고, 밟고 올라가고, 감언이설하고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죽을 때 되면 허무해가지고 “내가 왜 그랬노?”하는데, 그럴 때는 늦은 겁니다. 허전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구하는 마음이 없잖아요. 구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원하는 마음이 줄어들고 착취도 하지 않게 되고 마음은 편안해지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전부 다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거죠. 마음이 만든 것을 혜국 스님이 새로운 시각에서 “오직 마음뿐 다른 경계가 없다.”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일화가 있습니다. 혜국 스님을 아시는 스님이 군에 갔답니다. 전방에서 근무를 하는데 소대장님이 나가면서 “이따가 올테니까 라면을 끓여놔라.” 그러니까 졸병이 말을 들어야겠죠. 난로에 얼음 덩어리를 넣고 물을 데워서 뜨뜻해지니까, 그 스님이 이십여 일간을 발을 못 씻었대요. 발이 시럽고 동상도 걸릴 거 같고 해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얼른 뜨거운 물을 덜어내서 발을 그 물에 씻었대요. 20일 동안 안 씻어서 꼬랑내 나는 발을. ㅎㅎㅎ 그런데 소대장님이 갑자기 들어오시면서 “빨리 끓여라!” 라고 재촉을 하시더래요. 빨리 안 끓이면 호통 칠 거 같고, 물을 다시 끓이자니 힘들어서 발 씻었던 물에 라면을 집어 넣어가지고 끓였대요. 냄새가 날까 싶어서 서너 개를 끓였지요. 발 씻은 물에 끓여가지고 드렸는데 소대장님이 “좀 짜기는 하지만 맛있다” “야, 너도 좀 먹어라.” 하시는데 그걸 못 먹었다는 거 아니겠어요. ㅎㅎㅎ 혜국 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이게 바로 일체유심조, 마음이 만든 것이다. 스님은 더럽다는 경계가 생기니까 못 먹고, 모르는 소대장은 자기가 만든 더럽다는 경계가 없으니까 먹은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군에 간 사람들은 커피 끓여오라 그러면 상관이 미워가지고 가래 뱉어서 휘휘 저어 가지고 갖다 준다고 그러대요. 그거 알면 아마 소대장 못할 겁니다. ㅎㅎㅎ 그래서 원성실성의 경계는 바로 부처님 경계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어렵지 않고 굉장히 쉬운 겁니다. 어려우면 집에 가서 손가락 한번 젖히어 보고 연습을 해보세요. 맞나 확인해보고 생각해보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불교는 아이의 종교가 아니라 어른의 종교라고 합니다. 아이들[정신 연령이 낮은 사람]은 모르죠. 아이들에게는 사탕 주면 좋아하지만 어른들에게는 사탕 주면 싫어하잖아요. 마찬가집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른의 종교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이 가르침을 좋아하고 아이들은 싫어합니다. 혹시 본인이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에 나오지 마세요. 아무리 들어도 이해 못하니까. 그래도 내가 아이지만 어른 된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계속 나오고.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아이들은 많이 데려오세요. 정신 연령이 낮은 사람을 얘기 하는 겁니다. 아무리 어른이라도 유식을 모르면 어린 아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말나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하세요. “스님, 마음은 여기[가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여기 없잖아요?” 마음이 거기 있으면 칼로 째보면 나오겠네요?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머무는 데가 없지만 토대로 하고 있는 데가 심장입니다. 의식이 심장을 토대로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의식은 어디든 다 가거든요.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교통사고나 뇌사를 당하더라도 가슴 부위가 따뜻하면 안 죽은 겁니다. 가슴이 따뜻하면 아직 마음이 안 떠났다는 겁니다. 다른 부위가 다 식어버리는데 심장만 따뜻한 기운이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의식이 심장을 토대로 해서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의식이 그렇다는 얘기고 마음 자체는 실체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효스님께서 분명히 얘기하셨습니다. 이 마음을 찾으면 없고, 없다고 하자니 만물은 모두가 이 마음을 타고 나타난다고 얘기합니다. 「대승기신론」 첫머리에 그 얘기가 나옵니다. 삼라만상 우주를 만든 것도 마음이고, 몸뚱아리을 만든 것도 마음이고 그래서 불교의 창조주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창조주입니다. 심지어 하느님 까지도 마음이 만들었습니다. 그걸 확실히 아셔야 됩니다. 또 다른 질문 있으신 분? “정념이란 말과 반조란 말은 같은 뜻인가요?” “예, 같습니다. 알아차림하면 그것이 바로 보는 힘이 생겨서 회광반조가 되는 겁니다. 관(觀) 속에서 작용하는 정념을 ‘관하는 지혜’라고 「종경록」에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볼 관자, 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보지만, 알아차림으로 보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보는 힘이 점점 더 생기는 겁니다. 그게 회광반조입니다. 끝내겠습니다.
    註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