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실상에 머리숙여 예배한다 (강의 - 1)
『환원집』 「자타관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두 사람의 몸을 자타로 구분할 때에는
상대방의 몸은 타(他)가 되고 자신의 몸은 자(自)가 된다.
자기 하나의 몸에서 다시 자타로 구분한다면
몸뚱아리는 타가 되고 마음은 자가 된다.
자타(自他)는 주객(主客)을 얘기하는 거죠.
관문(觀門)은 볼 관(觀)자 문 문(門)자를 쓰는데
자(自)와 타(他)를 잘 관찰[觀]하면 실상으로 들어갈[門] 수가 있는 거죠.
지금 이 이야기는 자와 타를 나누어서 이야기 하지만
자타를 통해서 자와 타가 없는 진실상의 세계,
주객이 없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얘기 합니다.
이게 수행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화두를 참구하든 관법을 하든 관심을 하든
반드시 자타, 주객이 항상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이런 얘기에요.
두 사람의 몸을 자타로 구분할 때에는
상대방의 몸은 타(他)가 되고 자신의 몸은 자(自)가 된다.
자기 하나의 몸에서 다시 자타로 구분한다면
몸뚱아리는 타가 되고 마음은 자가 된다.
이것은 대부분 다 아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몸뚱아리도 타가 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기가 쓰는 마음을 또 자타로 구분할 때에는
번뇌 덩어리인 마음은 타가 되고 지혜는 자가 된다.
지혜를 다시 자타로 구분하면 유소득지(有所得智)는 타(他)가 되고
무소득지(無所得智)는 자(自)가 된다.
번뇌 덩어리가 타가 된다는 말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게 온갖 생각이 일어날 때 있잖아요.
이럴 때 온갖 생각은 타가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은 자가 되는 거죠.
여기 중요한 것은 지혜라는 말이 있어요.
이 번뇌 덩어리 마음이 타가 되는데
그 타를 보는 마음이 지혭니다.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문제 해결하는데 아주 중요한 겁니다.
특히 우울증 환자들은 대개 자동적인 생각이 일어나가지고
그 생각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아요.
생각을 부정 못하니까 자살을 생각하고 그런 겁니다.
부정을 못한다는 말은 자기감정, 생각을 객관적으로 보지를 못한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심리 치료하는 쪽에서도 불교 명상을 도입해가지고
철저하게 감정이나 생각을 보게끔 훈련을 시켜요.
자기감정이나 생각이 변한다는 것을 직접 캐치가 되면
그때부터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데서 벗어나기 시작해요.
심리치료를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런 치료법은 2003년도에
불교 명상에 관한 10여권의 책들이 번역되면서 부터 시작했어요.
그 중에서 유명한 책이 「붓다의 심리학」이라는 책이고
하나는 「선 치료」라는 책이에요.
「붓다의 심리학」에서는 남방의 위빠사나를 도입해서 치료하는 방법이고
「선 치료」는 바로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선(禪),
이 선을 가지고 응용해서 심리 치료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명추회요는 종경록에서 나온 부분인데,
자기감정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심안(心眼)이 열려야 된다.
보이는 세계에 모양과 색깔은 육안으로 볼 수가 있지만
감정과 생각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심안이 열려야만 보는 거죠.
심안으로 보는 것을 볼 관(觀)이란 말을 씁니다.
그래서 여기 자타관문 할 때 관자가 볼 관자입니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게 아니고
마음이 직접 감각기관을 의지하지 않고
바로 보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사물을 볼 때 뭐가 봅니까?
눈으로 보죠?
사람들은 다 그렇게 눈으로 본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 논쟁에도 그 얘기를 하고 있어요.
부처님께서 “아난아, 무엇이 보느냐?”하시니까
아난이 “눈이 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럼 죽은 사람도 눈이 있는데
죽은 사람도 봐야 되지 않겠느냐.”
죽은 사람은 눈이 있어도 못 보죠?
그러니까 아난이 얼른 알아차려가지고 “마음이 봅니다.”이랬어요.
그래서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마음이 사물을 인식하고 모양과 색깔을 보는데
수행을 하면, 이 눈이라는 수정체를 의지하지 않고
마음이 바로 대상을 볼 수가 있다는 거죠.
그게 관, 명상이에요.
이것은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다보면 저절로
눈을 감고 있는데 눈이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눈을 감고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데 눈이 막 떠지려고 한다든지
이런 현상들이 전부다 심안이 열렸다는 거예요.
이게 어렵게 생각하는데 어렵지 않아요.
예를 들어,
호흡 관찰을 할 때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 호흡의 들숨 날숨의 느낌을 관찰하는 거죠.
그러면 인중이나 코 끝에 들숨 날숨의 감각이 있을 때 캐치를 하는 겁니다.
캐치를 하다보면 눈은 감고 있는데 어느 순간 코 주위가 보여요.
그게 지나면 그 다음은 얼굴이 보이고,
이게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 몇 주쯤 지나면 전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이제 관(觀)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감각을 알아차림이 관의 내용이에요.
그렇게 점점 보는 힘이 깊어지면
느끼는 게 아니고 피부로 호흡하는 게 보이게 되는 거예요.
아까 코가 보이고 코 주위가 보이고 하는 것처럼 느낌이 아니고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보이기 시작하면
기운이 발끝까지 가고, 손끝까지 가고,
더 지나면 몸이 아주 투명해지기 시작해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도 보이고,
나중에는 몸이 마치 골짜기처럼 텅 비고
머리도 사라져 버리고 팔도 사라져 버리는 현상이 오는 거예요.
이것을 욕계삼매(欲界三昧), 몸삼매라 그럽니다.
이런 삼매가 올 때를 선정에 들어가기 전 단계라는 겁니다.
이렇게 의식이 가슴으로 쭉~ 내려옵니다.
가슴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데까지 내려오는 거죠.
이렇게 되면 선정에 들어갈 준비가 된 거죠.
얘기 하자면 관이라 하는 것은 그렇다 그 말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눈을 감고 있는데 눈이 탁 뜨는 사람은 관이 됐다는 거죠.
이렇게 눈을 감고하는 것은 심안을 여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관찰 대상이 있을 때 그렇고,
화두 같은 경우는 몸을 관찰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졸아버립니다.
그럴 때는 반안, 반쯤 떠야 됩니다.
화두 참구할 때는 그래야만 심안이 열리는 겁니다.
그래서 간화선(看話禪)할 때 볼간(看)자 쓰는데 마음으로 보는 것을 얘기 합니다.
볼 관(觀)이나 볼 간(看)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여기 얘기가
‘번뇌 덩어리인 마음은 타가 되고 지혜는 자가 된다’ 했죠.
지혜라는 것은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꿰뚫어 봐가지고 그것이 올바른 판단 작용이 섰을 때 지혜라 그럽니다.
꿰뚫어 보려면 처음에는 변화를 관찰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수식관에서 호흡이 들숨 날숨의 변화를 관찰하고
남방에서는 배(복부)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관찰해요.
마음을 관찰할 때도 고정된 마음을 관찰하는 게 아니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그래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변화를 관찰합니다.
처음에는 모양과 색깔을 꿰뚫어 보면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를 보다 보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주체나 실체를 찾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꿰뚫어 본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아! 이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도 없고
변화가 머물지 않은 것을 보니까 고정되어 있는 실체라는 것은 없는 거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판단이 될 때 그것을 지혜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번뇌 덩어리인 마음은 타가 되고 지혜는 자가 된다’ 그런 거예요.
수행은 주관이 객관을 보는 거예요.
그 이전에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또 하나 있어요.
여러분들이 보통 사물을 인식을 할 때 그냥 인식 하죠.
대상을 인식하드라도 주관과 객관이 분명하게 구분이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관찰 대상과 관찰을 하는 정신작용을 구분 못합니다.
이게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남이 나를 칭찬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좋아하고,
남이 비난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냥 따라가서 화를 내고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대상을 인식할 때
인식하는 정신작용과 그 대상이 구분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차를 한 잔 마시더라도
차 맛하고 차 맛을 아는 정신작용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되요.
남이 나를 비난할 때 비난하는 대상하고
그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내 정신작용을 구분해서 알아야 되요.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구분이 될 때 비로소 자기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데
이 정신작용이 아주 미세한 경우가 있죠.
그것을 의도(意圖)라 그래요.
사람들이 같이 앉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탁~ 열고 나가는 경우가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그 이전에 의도가 일어난 거예요.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생각하다가 꾹 참기도하고 또 법문 듣다가
나중에 5분 뒤에든 10분 뒤에 벌떡 일어나 가는 거예요.
이것이 무의식중에 일어난 것 같아도
그 이전에 미세하게 한 생각이 탁~ 일어난 거예요.
항상 몸이 움직임이 있을 때에는
몸이 움직이기 전에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미세한 마음 움직임, 의도까지 캐치할 정도면
구습이 없어져 가고 창의적이거나 창조적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거친 작용은 캐치 되지만
공부를 안 하면 미세한 것은 캐치를 못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서 미세한 작용까지 캐치가 되면
여기서 얘기하듯이
몸은 타가 되고 몸을 인식하는 것은 자가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번뇌덩어리는 타가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지혜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의도를 캐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거예요.
‘지혜를 다시 자타로 구분하면
유소득지(有所得智)는 타(他)가 되고
무소득지(無所得智)는 자(自)가 된다.’
유소득지, 얻을 바가 있는 지혜는 타가 되고,
무소득지, 얻을 바가 없는 지혜는 자가 된다.
얻을 바가 있는 지혜라는 말은
「대승기신론」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체 망념이 일어나면 정념으로 제거하라.’
정념, 알아차림이 지혭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해요.
‘제거를 했으면 제거했다는 생각도 버려라.’
내가 제거했다는 마음이 있으면 없는 마음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소득이 있는 지혜가 됩니다.
그런데 얻었다는 생각도 놔 버리면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의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때는 대상이 공함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에도 지관(止觀)수행을 하는데
원효스님께서 달아놓은 주석표에 보면
‘대상을 제거했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그것을 인연해서 다시 생각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거했다는 생각도 놔 버려야 됩니다.
그것을 무소득지(無所得智), 근본지(根本智)라 그럽니다.
이렇게 지혜도 유소득지와 무소득지, 자타로 보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상대방 몸이 타가되고 자신의 몸이 자라 했다가,
몸을 타라 하고 몸을 인식하는 마음을 자라 했다가,
그 다음에 번뇌망상을 타로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지혜를 자라 했고
그리고 지혜도 자타를 구분하고,
이렇게 해서 점점 깊게 미세하게 들어가는 거죠.
이게 수행해서 들어가는 과정을 얘기하는 겁니다.
화두를 참구하시는 분들이 종종 이런 얘기를 해요.
‘이뭐꼬’ 하든지 ‘왜 뭐라 했을까’하고 화두를 참구 하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참구하는 마음을 뒤에서 보는 자가 또 생기더라.
그래서 뒤를 보니까 그 뒤에서 또 생기더라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생기는 것은 이중관찰이지만
여기 명추회요대로 얘기하면
그렇게 관찰해 가는 게 점점 깊이 들어가는 거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을 보면
‘아! 수행하는 게 이런 식으로 해서 본연의 마음자리로,
모든 존재의 실상의 자리로 들어가는구나.’ 하고 이해할 수가 있죠.
그 다음에, 지혜도 자타로 구분해 들어가면
굉장히 미세한 쪽으로 마음의 청정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무소득지를 다시 자타로 구분하면 청정한 지혜는 타(他)가 되고
청정한 지혜를 다시 더 청정하게 하는 지혜는 자(自)가 된다.
이 말을 잘 알아야 되요.
자타를 구분하는 것은 점점 빛이 들어가는 것을 얘기 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내가 자가되고 남을 타라고 구분하는 이 정도 수준으로 살아가는데
수행을 계속해가면, 이 자타 구분이 밝고 분명해지고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자타는 서로 의지하는 갈대와 같다고 지난 시간에 배웠죠.
자타를 잘 구분해 들어가는 것은 지혜다,
이렇게 자타를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깊이깊이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본질을 꿰뚫어 들어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준 것이다 이 말이죠.
결국 자타는 마음이 주객으로 구분 됩니다.
청정한 마음도 더 청정해지면
덜 청정한 마음이 타가 되고 더 깊은 청정은 자가 되죠.
계속 그렇게 가다보면 자타가 없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없어진다, 소멸 된다는 거죠.
현상이 마치 존속하는 게 아니고 소멸 되듯이.
이렇게 되면 아주 재미있는 것은
자와 타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갈대가 서로 의지한 것 같더라,
그래서 주객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사안에서는
아직까지 실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법이던 관심이던 화두를 들던 마찬가지에요.
「참선요지」에 보면
화두를 의심해 가다가
화두를 의심하는 상태에서 화두를 보는 단계로 넘어간다.
그때는 머리위에 다시 머리를 올려놓은 것 같아서
더 이상 화두를 참구하면 안 된다,
그럼 그때 보이는 화두는 어떤 모습으로 보이느냐 하면
청정함, 불생불멸로 보인다 이거죠.
그렇지만 아직까지 주객이 나눠져 있는 거예요.
청정하고 공한 모습을 보는 마음을 각조(覺照)라고 합니다.
그러자마자 둘이 하나가 되어서 주객이 차단되어 버리면
요요상지(了了常知)라, 분명하게 항상하는 앎으로 들어가는 거죠.
이게 깨달음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화두 참구를 예를 들어서 얘기 했지만
관법이던 관심이던 똑같습니다.
항상 주객으로 보면 그렇게 되는 거죠.
끝에 가면 주객이 없는 자리로 들어간다.
들어갈 때는 관찰 대상도 텅 비어있지만
관찰하는 주관의식도 텅 빈 채로 들어간다 이거예요.
『종경록』 「원교사념처관」에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께서
‘대상을 볼 때 대상에 상이 없음을 보면 주관도 상이 없다.
비춰보는 마음이 있으면 대상도 비춰 본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대상이 상이 없고 주관도 상이 없음을 일상무상(一相無相)이라 합니다.
이럴 때 일어나는 게 상적(相寂), 주객이 서로 고요하다,
비추는 것만 있을 때는 상조(相照)라고 해서
상적상조(相寂相照)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또 쌍차쌍조(雙遮雙照)라는 말도 쓰는데 쌍(雙)이라는 말은 주객을 얘기하죠.
이런 어록(語錄)에 나오는 용어를 이해하려면
역시 여기도 자타, 주객을 잘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주객이 없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본연의 마음자리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정상태,
본삼매(本三味)에 들어간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본삼매에 들어갈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 와서는 구체적인 얘기가 없어요.
본삼매에 들어가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있고
점검해야 될 사항이 있어요.
그것은 들어간 사람에게만 얘기하고 여기서는 얘기 안하겠습니다.
안 들어간 사람에게 얘기하면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본삼매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의식이 가슴 쪽으로 내려온다는 거예요.
이 정도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본삼매에 들어가는 데도 점검할 게 참 많습니다.
굉장히 미세한 데에 들어가기 때문에
얘기하자면 한정도 없습니다.
어렵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