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실상에 머리숙여 예배한다 (강의 - 6)
마음이 공하면 법이 공한 것이요
법이 공하면 마음이 공한 것이다.
여기에 마음이라는 것은 전오식 다음의 의(意)예요.
마음이 공하니까 마음의 대상인 법(이때는 개념입니다)도 텅 비어진다.
그래서 ‘법이 공하면 마음이 공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주객이 없는 자리에요.
그러니까 전에 공부한 ‘자타관문’에서 분명히
주객으로 해서 깊이 들어갔다 그랬죠.
한 번 더 설명하면,
내 몸은 타가 되고 내 몸을 인식하는 마음이 자가 된다,
번뇌망상은 타가 되고 번뇌망상을 실체로서 꿰뚫어 보는 것은 자가 된다,
그게 지혜죠.
이 지혜도 둘로 나눠서,
얻을 바가 있는 지혜[有所得智]는 타가 되고,
얻을 바가 없는 지혜[無所得智]는 자가 된다,
그 무소득의 지혜도 청정한 지혜는 타가 되고, 더 청정한 지혜는 자가 된다,
이렇게 자타를 구분해서 깊이 관찰해 들어가니까
마음의 본질이 청정하다까지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청정이라는 말은 본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분별이 없다, 무분별을 얘기 할 때는
분별망상에 대해서 무분별을 얘기 하고,
생겼다,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을 함이 있는 법, 유의법이라 하고,
생겼다,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을 무의법이라 합니다.
그런데 본성은 청정을 얘기 합니다.
이렇게 청정을 얘기 했는데,
그러면서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는 것은
갈대묶음이 서로 의지한 것과 같다,
갈대묶음이 서로 의지한 것은 실체가 없는 거죠.
이 실체가 없는 것을 꿰뚫어 봐야 됩니다.
여기에 얘기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눈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이 공하니까
대상이라는 것도 실체가 없이 공하더라.
주객이 없는 자리에 들어간 거죠.
지금부터 중요한 거예요.
주객이 없는 자리에 들어갈 때,
몸이 비어있다, 번뇌가 비어있다,
이렇게 객관인 대상이 비어 있는 것은 잘 봅니다.
그런데 주관이 비어있는 것은 사람들이 보지를 못합니다.
주관이 비어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타가 비어있는 자리를 못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자비수관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대상을 볼 때, 대상을 보는 시선을 한 번 보십시오.
그러면 보는 주체가 비어 있음을 봅니다.
기본적으로 대상을 보는 시선도 마음인데,
보고 있는 마음을 딱 보면 몸에 진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관이 비어 있음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 방법을 가르쳐 드렸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공부하시는 분 중에 한 분이 최근에
주객이 없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아! 거참, 오랜만에 점검을 하다가 기분이 좋았습니다.
확실하게 대상이 비어져가면서
주관도 비어서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거죠.
이 마음은 마치 빛과 같아서
사방을 쫙~ 비추면서도 비추는 주체를 또 비추거든요.
그러면 비추는 대상도 비어지지만
비추는 주체도 비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 주객이 없는 자리, 그 자리가 선정의 자리에요.
이럴 때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노출해서 얘기해버리면,
공부가 안 된 사람이 거기에 매달려 있다 보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하니까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주객이 없는 공한 자리에
들어갈 때 의식이 있고, 나올 때 의식이 있는데,
그 의식을 잘 캐취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들어갈 때 의식과 나올 때 의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점검할 때 말씀드릴 랍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피부)은 근이라 해서
뿌리 근(根)자를 씁니다.
모양과 색깔, 소리, 향기, 맛, 촉감은
대상, 색(色)을 얘기 하는데 경(境)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인 근(根)과 대상인 경(境)이 서로 만나면
법(法)이 생깁니다.
이 법이 구체적으로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서,
눈이라는 근(根)과 모양과 색깔이라는 경(境)이 만나면
시각이라는 법이 생기는 거예요.
이렇게 근경이 만나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인 마음이 생긴다는 거예요.
이 때 빨리 알아야 될 것이
마음이라는 것이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아비달마」에도
‘마음은 대상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마음의 특성은 아는 것입니다.
눈과 대상이 만나서 시각이 생겼다면,
눈과 대상과 시각이 만나면 촉이 생깁니다.
이렇게 만난 접촉에는 감각이라는 심리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감각의 소재, 지수화풍 4대가 결합해서 이미지를 내는
생각 상(想)이라는 심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는 것은
모양과 색깔이라는 상(想)심리에 의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상심리가 탁 멈춰 버리면 안 보인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서 선악의 생각을 일으키는
생각 사(思)라는 심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심리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심리가 일어날 때 모양과 색깔이 나타나는데,
이런 심리가 다 사라져 버리면
모양과 색깔 인식이 없는 상태, 선정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이것을 뒤집어서 본다면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심리 세곕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이잖아요.
마음 외에는 없는데, 마음 쪽에서도 심리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은 심리 현상이에요.
그 다음에
하나의 공으로 돌아감으로
두 가지 모두가 공할 수 있고
하나의 공으로도 가능케 한다.
이 때문에 공공이라 하기도 하여
방편으로 진리를 본다고 하네.
‘하나의 공으로 돌아감으로’
주관과 객관이 다 공하다 했죠.
눈이 공하고 형상이 공하고,
귀가 공하고 소리가 공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로 돌아갔다 이 말이죠.
‘두 가지 모두가 공할 수 있고’ 이 말은 주객이 공하다는 얘기고
‘하나의 공으로도 가능케 한다.’ 는 주객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공이라는 거죠.
‘이 때문에 공공이라 하기도 하여’
공이라는 이 사실도 공하기 때문에 공공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진리는 어떻고 하는 것은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성철 스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남겼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전등록」에 나온 말을 한 구절 인용하신 거예요.
거기에 보면, 산승이 수행하러 가는데,
수행하러 갈 때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 했는데
참선수행 하다 보니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구나’하는 거예요.
산은 매순간 변하니까 산이 아니고
물도 모양을 바꿔 가니까 물이 아니더라 이 말이죠.
그래서 조금 더 공부 하니까
‘산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산이더라’,
물도 비어 있고 산도 비어 있고
비어 있는 성질이 똑같으니까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거죠.
그 다음에 더 공부를 하고 나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되는 거죠.
처음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은
산은 산대로 자립되어 있고 물은 물대로 자립되어있다고 본 것이고,
공부하고 나올 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은
이름이 산이고 물인 것이지 사실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내가 말하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이 세계다’
이름이 그냥 세계라 했을 뿐이지 실체가 없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육근이 청정함을 알고 있다면
육진으로 분별하는 망념은 없다.
육진으로 분별하는 망념 없다면
마음 바탕 스스로 청정하다네
방편으로 범부를 교화하여도
모든 명칭 불성에 의지한다네.
본문(한문)에는 조금 다르거든요.
‘육근이 청정함을 알고 있다면 육진의 도적은 없다.’이리 됩니다.
육진(六塵)에서 진은 티끌 진(塵), 대상을 얘기합니다.
육근인 눈, 귀, 코, 혀, 몸, 의근에 상대되는
모양 색깔과 소리, 향기, 맛, 촉감, 법을 육진이라 그럽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육진의 도적이 없다는 말은
도적이라는 것은 빼앗는 것을 도적이라 그러는데
여기에서는 경계가 마음을 빼앗은 거죠.
모양과 색깔은 눈의 대상인데
그것을 보고 ‘아! 가지고 싶다’하면
눈의 대상이 마음을 빼앗아 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 물질[六塵]은 도적이 되는 거죠.
이렇게 물질[모양과 색깔, 육근]은 훔치게끔 하는 거예요.
보통 경전에는 육근, 근이 도적이라고 보는데,
여기는 본문에 육진적(六塵賊) 했으니까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어요.
<서유기>에 보면 손오공이 오행산에 갇혔다가
삼장법사의 도움을 받아서 자유의 몸이 되어서 제자가 됩니다.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조그만 언덕을 넘어 가는데
여섯 명의 도적이 나타나서 ‘보따리 내놔라’하는 거예요.
그때 손오공이 여의봉으로 모두 죽입니다.
그러니까 삼장법사가 사람을 죽였다고 혼을 내자
손오공이 화가 나서 가버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 손오공이 죽인 여섯 명의 도적은
눈으로 보고 기쁨을 탐한다는 안간희(眼看喜),
귀로 듣고 성낸다는 이청노(耳聽怒),
코로 냄새 맡고 즐긴다는 비후애(鼻嗅愛),
혀로 핥고 생각한다는 설상사(舌嘗思),
마음으로 보고 탐낸다는 의견욕(意見慾),
자기 때문에만 근심한다는 신본우(身本憂), 육근을 말합니다.
육근 도적이 나타난 거죠.
그래서 잘 살펴보면 <서유기>는 수행 현상에 대해서 얘기한 겁니다.
마지막에는 불경을 얻어오는 것을 깨달음을 표현한 거예요.
그 사이 수많은 마귀 마왕이 나와서 수행자를 괴롭히는데
그 마귀 마왕이 번뇌 망상이거든요.
수행을 하는데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주범이 육근입니다.
이런 육근이 있어서 내면으로 깊이 못 들어가는 겁니다.
예를 들어, 총각이 수행을 하는데 갑자기 예쁜 처자가 지나가니까
눈이 휘둥그레져가지고 그쪽을 쳐다보는 거예요.
그럼 내적 관찰하는 게 멈춰져 버리고 육근이 처자를 따라가니
눈이 도적놈이 된 겁니다.
처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훔치게 된 거죠.
그렇게 되면 수행이 끝나버리는 겁니다.
「청정도론」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 끝에 여자가 화가 나서 집을 나와 버렸어요.
언덕을 넘어가는데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스님들이 수행 하면 얼굴 모양이 훤~ 하게 바뀝니다.
스님이 굉장히 멋있고 어찌나 잘 생겼던지,
이 아낙네가 마음이 동해서 웃으면서 스님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부정관(不淨觀)을 공부하는 스님이에요.
이 아낙이 입을 벌리고 웃으면서 얘기 하는데
햇빛에 치아가 반사되는 것을 보게 된 거예요.
그 순간 아낙이 뼈로 보인 겁니다.
뼈를 보는 순간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서 바로 아라한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낙네에 유혹을 물리치고 길을 가는데
여자의 남편이 쫓아와서
“이러이러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 못 보셨습니까?”하니까
“지나가긴 지나갔는데, 남잔지 여잔지 잘 모르겠고,
뼈 무더기가 지나갔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ㅎㅎㅎ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육근의 도적을 확실히 잡은 스님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육근이 청정함을 알면 육진의 도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둑질 하게 하는 놈이 없다, 분별이 없다는 말이죠.
육근의 대상인 육진이라는 도적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육진으로 분별하는 망념 없다면
마음 바탕 스스로 청정하다네’
마음 바탕이라는 것은 심왕(心王)이에요.
심왕이라는 말은 마음을 왕에 비유한 겁니다.
신하는 심소(心所)라 해서 심왕에 소속되어 있는 현상, 심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왕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도
비서진이나 신하가 안 된다고 하면 마음대로 못하죠.
그래서 심리[심소]에 의해서 심왕이 속박을 당하는 거예요.
이렇게 심왕을 속박하는 심리가 사라져 버리면
심왕이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육근과 육진이 알고 보면 전부 심리현상인데
싹 사라지니까 심왕이 아주 청정해진다, 이런 얘깁니다.
이런 심왕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여덟 개가 있는데,
주객이 사라졌으니까 이 여덟 개의 마음이 청정해 졌다는 거죠.
그것을 자성청정심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범부를 교화하여도 모든 명칭 불성에 의지한다네.’
알고 보면 모든 본질은 청정이니까
그 자리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공한 자리에요.
그렇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은
지가 중생인줄 알고 온갖 고초를 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이나 구제되는 중생은 평등하거든요.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보디사트바가 중생을 구제해도 구제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이랬습니다.
왜? 보살이나 중생은 똑같기 때문에.
그렇지만 중생만은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참 불쌍하지요.
불쌍하니까 중생을 방편으로 교화하는데,
모든 명칭, 부처니 중생이니, 모양이니 색상이니 이런 명칭,
이런 것은 모두 불성에 의지한다네,
자체 성품에 의해서 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깥세계는 마음이 투영되어 나타난 세계, 마음의 그림자라 했죠.
그 그림자의 주인이 부처의 성품, 불성입니다.
그래서 ‘모든 명칭은 불성에 의지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보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안에서 바깥으로 나왔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내적 관찰, 수행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수행을 해서 본질을 확실히 깨닫고 나니까
다시 모르는 중생을 위해서 마음 바깥으로 쫘악~ 쓰는 거예요.
오늘 공부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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