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의 분별 (강의 - 3. 明了意識)

경호... 2011. 9. 19.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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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의 분별(강의 - 3) 여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명료의식(明了意識)이며 또 하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이다. 명료의식은 오직 오근문(五根門)에서 오진(五塵)의 경계를 취하는 것이다. 처음 한 생각이 오근(五根)과 더불어 같이 인연지어질 때에 인연지어지는 처음 순간의 마음에서 오직 현량(現量)으로 실지 오진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명료의식(明了意識)이며 또 하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이다.’ 의식은 모든 것을 인식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무위법, 진여, 일심, 불성도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이런 의식의 특징은 명료합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보는 걸 명료하게 볼 수 있죠? 그것은 의식 때문에 그런 겁니다. 명료하게 아는 것은 전부 의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식이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다섯 가지 감각하고 같이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작용하는 것은 오근이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명료의식은 오직 오근문(五根門)에서 오진(五塵)의 경계를 취하는 것이다.’ 밑줄을 칠 만큼 중요한 얘깁니다. 오근은 눈, 구, 코, 혀, 몸 다섯 가진데 이것을 통해서 의식이 다섯 가지 경계[五塵]를 인식합니다. 오진은 형상은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다섯 가집니다. 오진(五塵)에서 진(塵)은 다섯 가지 경계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티끌 진(塵)자를 씁니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가 빨리 알아야 될 게 하나 있어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잠시 머물 뿐이지 지속적으로 머물지 않는 다는 겁니다. 향기, 맛, 촉감도 마찬가집니다. 나타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래서 티끌 진자를 쓴 거예요. 여기서 ‘오근문(五根門)’ 이라는 것은 눈이 문이 되고, 귀, 코, 혀, 몸이 문이 된다는 거죠.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출입구입니다. 다섯 가지 문을 통해서 다섯 가지 경계를 인식한다는 겁니다. 그럼 이건 명료하다 하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명료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여러분 제대로 알아요? 잘 모르죠? 「아비달마」에 보면 아는 것이 마음의 특성이라고 얘기 합니다. 마음은 혼자 일어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대상을 인식해서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유식에서는 타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의타기성이라 그럽니다. 그러니 마음은 혼자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죠. 이런 마음을 다른 말로 하면 연기(緣起)라 그럽니다. 마음은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대상을 인식하면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을 연기라 그럽니다. 그러면 상호 관계를 가진다는 말은 ‘안다’는 말이 되요. 관계성 앎이에요. 그러니까 앎은 마음이고, 연기를 일심, 진여, 불성이라고 그러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송광사 강주로 있을 때 전국 학인들한테서 궁금한 게 있으면 가끔 전화가 옵니다. 그때 어떤 한 학인한테 전화를 받았어요. “스님, 연기법이 뭡니까?” 그래서 “스님이 나한테 전화를 하고 그래서 내가 전화 받은 거, 이게 연기법이다.” 서로 상호 관계성 속에서 전화 통화, 소통이 일어나죠? 이걸 연기라 그래요. 두 번째 질문이 “스님, 연기가 마음이라 하는데, 연기가 왜 마음입니까?” 송광사에서 강의할 때 녹음한 테이프가 있어요. 그 테이프에 있는 ‘연기가 마음이다’ 라는 내용을 듣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스님이 나를 알고, 내가 스님을 알고 있지 않느냐. 이 앎에 의해서 상호 소통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연기가 마음이다.” 맞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알기 때문에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데 만일 그 중에서 부인이 외출 갔다가 불행히 교통사고가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분명히 주소대로 사람을 데려 왔는데 남편보고 ‘당신 누구세요?’ 이럴 수 있죠? 모르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면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겁니다. 관계 속에서 이어지는 게 앎에 의해서 이어지는 거예요. 앎은 뭡니까? 마음이죠. 그래서 연기가 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대상을 통해서 인식하는 게 명료하다는 거예요. 명료(明了)하다는 것은 ‘분명하게 안다’ 이런 얘깁니다. 흐리멍텅하게 아는 게 아니고 명료하게 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의식에 특징이 명료성이에요. 왜 명료성이냐?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이 오근의 문을 통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인식하기 때문에 명료하다는 겁니다. 그럼 인식하는 게 왜 명료하냐? 대상이 똑같다면 그 대상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대상의 모양과 색깔이 각각 다르고 차별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명료하게 인식이 가능 한 거예요. 이런 얘기가 우리 일상생활에 도움이 될까요, 안 될까요? 이익이 있어야지 도움이 안 된다면 우리가 공부할 필요 없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마타 수행을 해가지고 선정을 얻는다고 무지가 타파되는 게 아니고 법문을 잘 들어야 되요. 법문을 들어야 만이 무지가 타파되는데 듣기만 하면 타파되는 게 아니고 사유를 해야 됩니다. 그것을 사유하면서 지혜가 생기는 거예요. 그렇다고 거기서 끝나면 안 되고 내가 듣고 사유를 했으면 수행을 해서 체험을 해야죠. 그래서 법문 듣는 게 중요한 겁니다. 법문 안 듣고 수행하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하는 분들은 스승 없이 한적한 데서 혼자 수행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지혜를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수행처소에 반드시 경로를 해제해 줄 수 있고 수행 점검을 해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한 거예요. 그것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하나하나 분별하고 분석하는 것은 지혜를 일으키는 겁니다. 이 지혜는 잘못 앎으로 일어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간단하게 얘기할게요. 고통에는, 늙고 병드는 고통이 있고, 오음으로인한 고통[五陰盛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서 오는 고통[愛別離苦], 미운사람을 만나야 되는 고통[怨憎會苦], 구하는데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등 얼마나 많아요. 이런 것들은 무너지면서 오는 고통들이에요. 이렇게 무너지면서 오는 고통은 형성 된 것에서 오는 겁니다. 형성 된 것은 반드시 무너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사람으로 형성 된 것이 반드시 무너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죠. 우리는 그런 것을 인식 못하고 형성 된 모양과 색깔을 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무지로 오는 거죠. 이게 찻잔이죠? 이것은 흙에다가 물을 부어서 이겨가지고 모양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서 구워서 찻잔이라는 게 나온 거죠. 이게 흙, 물, 불, 바람, 네 가지 원소에 의해서 이루어졌구나. 이렇게 화합되어서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해체된다는 것을 알더라 이거죠. 이렇게 바르게 알면 이게 1억 원짜리 찻잔이라도 탁 깨지면 아프겠어요, 안 아프겠어요? 안 아프죠. 이렇게 알면, 몰랐을 때 깨지면 아픈 고통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분별하고 분석하는 것은 지혜를 일으키는 겁니다. ‘처음 한 생각이 오근(五根)과 더불어 같이 인연지어질 때에 인연지어지는 처음 순간의 마음에서 오직 현량(現量)으로 실지 오진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오근과 더불어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나가지고 대상을 인식한단 말이죠. 여기 ‘오근(五根)과 더불어 같이 인연지어질 때’에서 ‘인연’ 대신에 ‘연’이라고 하는 게 좋겠죠. 이 말은 「아비달마」에 보면 바방가(bhavaṅga, 잠재의식)라는 말을 쓰는데, 이게 대상이 처음 지나갈 때는 별로 반응하지 않다가 두 번째 찰나에서는 마음이 반응을 일으키면서 오근으로 바뀝니다. 예를 들어 사물을 보면 안근(眼根)으로 바뀌고 그 다음은 시각으로 바뀌어요. 시각에서 대상을 반연하고 추구하고 판단해서 좋아하고 싫어함을 알고 흘러가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대상을 인식할 때 물질이 한 번 바뀌는 순간 마음이 열일곱 번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거창하게 얘기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눈은 안근(眼根)이라 그러죠. 눈[根]이 대상[境]을 만나면 이 두 가지가 연(緣)이 되어서 시각[眼識]이 생깁니다. 이렇게 세 가지[눈, 대상, 시각]가 만나는 것을 촉(觸)이라 그럽니다. 촉이 일어나면 다시 이 시각이 물질을 인식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보고 저는 여러분을 보죠. 이렇게 보는 것은 전부 접촉이에요. 접촉하니까 시각이 생기면서 ‘아, 스님이 법문한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인식이 되잖아요. 그러면 감각이 일어납니다. 감각을 통해서 모든 경계가 다 나타나요. 그랬을 때 첫 번째 인식되는 것이 현량(現量), 직관입니다. 접촉해서 감각이 일어났는데 이 감각이 일어나는 경계는 현량으로 알아낸 거예요. 이때의 경계는 모양과 색깔 보다는 느낌으로 오죠. 따뜻하다, 차갑다, 두껍다, 얇다, 거칠다, 부드럽다, 이런 것들 입니다. 이 문제는 대상에 접촉했을 때 처음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 게 명료의식을 설명하는 부분이에요. 대상을 봤을 때 명료하게 ‘이것은 무엇이다’하고 앎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다음시간에 또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