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의 분별(강의 - 2)
오늘 주제는 삼경과 삼량인데
하나하나 설명을 드릴게요.
문 : 의식은 몇 가지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을 어떻게 분별하는 것입니까.
답 : 옛스님은 “제육의식(第六意識)은 추론하여 헤아려서 아는 비량(比量)이다.
의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법과, 선과 악과 무기(無記)의 법과,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법 및 온갖 법 등을 반연하는 것이다.
법으로서 존재하는 그러한 모든 것은 제육의식이 반연한다”고 하였다.
‘의식은 몇 가지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을 어떻게 분별하는 것입니까.’
의식은 성경(性境), 대질경(帶質境), 독영경(獨影境), 다 반연을 합니다.
‘옛스님은 “제육의식(第六意識)은 추론하여 헤아려서 아는 비량(比量)이다.’
제6 의식은 비교할 비(比)자 비량(比量)이고
비량(比量)은 전부다 추리에 속하는 겁니다.
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전부다 추리에 속합니다.
여기서 비량에 대해 조금 얘기를 해야 되겠네요.
비량(比量)은 특징이 많아요.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이것은 뭐죠?
“찻잔이요.”
그럼 여러분이 찻잔으로 인식했을 때 비량(추리)입니까, 현량(직관)입니까?
직관입니까, 추립니까?
“직관이요.”
다들 직관으로 생각하죠?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이
이걸 찻잔이라고 말을 사용하면서 인식하는 것은 다 비량(比量)이에요.
직접 인식하는 걸 직관(현량)이라 그러고
간접 인식하는 걸 추리(비량)라 그럽니다.
그러면 ‘찻잔’이라는 언어를 사용 했습니다.
무엇인가 매개물을 이용하는 것은 전부다 비량(比量)에 속합니다.
이것을 인식할 때 무엇을 매개로 해서 인식했습니까?
‘찻잔’이라는 언어를 사용해서 인식했죠?
그러면 그것은 추리에 속하는 겁니다.
비량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누구나 다 안다는 겁니다.
여러분 ‘찻잔’이라고 하니까 다 알아버렸잖아요.
누구나 다 아는 것은 비량, 추리에 속하고,
반대로 직접 인식해서 자기만 아는 것은 직관, 현량에 속합니다.
이렇게 인식의 차이가 분명하죠?
그럼 어린아이가 젖 달라고 우는 것은 현량이에요, 비량이에요?
“비량이요.”
맞습니다.
어린아이에 울음소리는 말과 결합될 수 있죠.
배고프다, 밥 달라는 것하고 결합될 수 있기 때문에 추리, 비량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매개로해서 인식하는 것은 추리, 비량에 속하는 겁니다.
인식행위는 감각기관으로
감각대상을 파악하는 직접지각으로서의 현량과
어떤 대상을 직접 대면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면
그 말에 의한 인식은 직접 지각을 넘어선 추리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데
이것이 비량입니다
현량에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인식기관인 안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함께 작용하여 형성되는 거예요.
비량은 대상의 공통적인 모습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 인식작용의 특징은 반드시 말을 사용하여 형성된다는데 있는 거죠.
즉 비량은 눈앞에 있거나 없는 대상에 대해서
말을 사용하여 무엇인지 바르게 추리하여 아는 인식방법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의식의 특징이 대상을 인식하는 건데,
그 중에서 추리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
의식의 대상은 한정 될까요, 한정이 없을까요?
“한정이 있습니다.”
왜 한정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이비설신의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요.”
의식이?
“예.”
의식이라는 것은 거기에 국한되기도 하지만 안 되기도 합니다.
한계가 없다고 하시는 분, 어떻게 한계가 없습니까?
“마음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러면 의식은 마음 아닌가?
그렇지만 시각도 마음인데,
시각은 눈으로만 인식이 가능하지, 귀로는 인식 못하잖아요.
마음을 의지한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의지해서 그러는 것은 명확하지 않잖아요.
마음에는 여덟 개의 마음이 있는데...
그게 핀트가 빗나간 거예요.
포인트가 무엇인가 하면,
의식의 특징이 비량(比量)이라는 겁니다.
추리하기 때문에 온갖 것을 인식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비량, 추리의 대상은 직접 눈앞에 없어도 됩니다.
없어도 추리하잖아요.
직관이라는 것은 눈앞에 있어야 되고 효과가 있어야 되요.
눈앞에 찻잔이 있고 내가 만져서 확인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것은
직관에 속하고 현량인데
추리는 눈앞에 없어도 됩니다.
여러분 집에 강아지 있죠?
눈앞에 없는데 집에 강아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비량에 속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눈앞에 없는 대상도 인식할 수 있는 게 의식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수행의 주체는 의식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 보리심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의식이라는 겁니다.
감각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말나식이나 아뢰야식이 일으키는 것도 아니에요.
감각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에 지속성이 없습니다.
말나식은 마치 인식하는 것이 잠자는 것 같아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못미치는 겁니다.
아뢰야식은 불가지입니다.
너무 미세해서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의식은 왕성하게 대상을 인식하거든요.
제일 많은 심리를 동반하는 것이 의식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상속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속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킬 수가 있어요.
그래서 무위법이라든지 일심, 진여,
이런 것도 인식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겁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게 나와요.
수행을 할 때 기본적으로 몸이 다 사라져 버리면
몸 소멸 다음에 마음 소멸에 들어가죠.
몸이 관찰 대상에서 벗어나면 의식을 관찰 대상으로 삼습니다.
의식을 관찰하는데
거기에서 텅 빈 공을 발견해서 계속 집중하게 되면 선정이 생깁니다.
이렇게 선정이 생겨서 자유자재로 선정에 들고 나오고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선정에 의지해서 공을 분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공에 대해 사유를 하는 거죠.
이때 공을 사유하는 것은 감각입니까, 의식입니까,
자아의식입니까, 아뢰야식입니까?
의식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이 중요하죠.
공은 모양과 색깔이 없기 때문에 직관할 수 없습니다.
그때 필요한 게 사유에요.
이게 특히 대승위빠사나에서 쓰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깊이 사유를 해서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사유할래야 사유할 수 없는 경지에 가면 그때 직관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직관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때를 견공(見空)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아셨죠?
그래서 의식이 사유를 해서 지혜로 바뀔 때
묘관찰지로 바뀌는 겁니다.
감각,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이 네 가지 마음 중에서
제일 먼저 의식이 지혜로 바뀌는데 이때가 견공입니다.
의식이라는 비량이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아셔야 되요.
‘의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법과, 선과 악과 무기(無記)의 법과,’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인식 하겠어요.
‘선’은 착한 거고 ‘악’은 나쁜 것이고
‘무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거죠.
‘법’은 현상, 조건과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현상이라 했죠.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법 및 온갖 법 등을 반연하는 것이다.'
욕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색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이런 법과
온갖 법을 반연하는 것이다.
온갖 법을 인식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 했죠.
우리가 직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추리로서 반연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의식의 영역이 무한대에요.
그래서
‘법으로서 존재하는 그러한 모든 것은 제육의식이 반연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또 하나 얘기할 게 있는데,
제6의식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능가경』에서
제8아뢰야식에 아뢰야라는 이름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의식이 지혜로 변환이 될 때, 의식이 소멸되어 버릴 때
아뢰야라는 이름을 버리게 된다.
그러면 아뢰야라는 이름을 증식 시키는 것은 의식이 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의식의 반연처가 무한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반연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온갖 반연해서 일어나는 종자, 정보가 아뢰야식에 저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의식이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정보가 아뢰야식에 저장이 안 되죠.
예를 든다면,
농촌에 보면 과일을 수확해서 저장하는 창고가 있죠?
그런데 작황이 좋지 않아서 저장을 못하면
그 창고는 창고역할을 못하게 되는 거죠.
마찬 가지로 제6의식의 기능이 상실해버리면
제8아뢰야라는 이름을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6의식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부터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 속에는
의식이 작용한다는 것을 아셔야 되요.
또 한 가지,
의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놈은 진실한 것은 아니죠.
그래서 선가에서는 의식을 죽일 놈, 없애야 될 놈이라고 하긴 합니다.
맞긴 맞는데 깨달을 때는 무엇을 통해서 깨닫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마음에서 깨달음이 옵니까?
의식을 통해서 깨달음이 오죠.
선정과 지혜가 일어나는 것도 의식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별경심소(五別境心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별경심소는 의식에서 나타나는 다섯 가지 심리작용인데
특별한 경계를 만났을 때 작용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식이 수행 주체라고 하는 것인데
수행 주체라는 의미를 확실히 알아야 되요.
별 볼일 없는 의식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같이 흐르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자성 청정심이에요.
그 자성 청정심이 아뢰야식하고 같이 흐르기 때문에
언제든지 의식이 지혜로 변환[깨달음]이 가능한 거예요.
전오식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하는데 의식이 나쁜 놈이라고 하지만
한편은 수행의 주체가 된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자성 청정심이 회복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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