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청정한 마음경계 허공과 같다 (강의 - 5)
이제 결론적인 얘기를 합니다.
오음 육입 십팔계는 땅과 같으며
중생의 번뇌 업은 물과 같다네
바르지 못한 생각 바람과 같고
청정한 마음 경계 허공과 같다.
‘오음 육입 십팔계는 땅과 같으며
중생의 번뇌 업은 물과 같다네’
땅은 물이 지나가면 더 단단해지죠.
그래서 번뇌 업에 의해서 오온이 존재한다 이런 말이에요.
‘바르지 못한 생각 바람과 같고
청정한 마음 경계 허공과 같다.’
바르지 못한 생각이 무지인데, 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니까
바람과 같이 잡히지 않죠.
땅, 물, 바람, 허공을 비유해서 얘기를 하는데
땅은 물에 의지하고, 물은 바람에 의지하고, 바람은 허공에 의지한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업에 의해 존재하고
번뇌는 바르지 못한 생각에 의해 존재하고
바르지 못한 생각은 알고 보면 자성 청정심에서 나온다, 이런 얘깁니다.
바르지 못한 생각이라는 게 뭡니까?
이 바르지 못한 생각이 자성 청정심에서 나왔다는 게 맞습니까?
여기에 딜레마(dilemma, 兩刀論法)가 있습니다.
화계사에서 법조인 법회가 있었습니다.
불교계, 카톨릭계 판검사들이 모인 법횐데
제가 지도법사를 하다보니까 법문을 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카톨릭계 판사님 한 분이
“우리 기독교는 사탄이라는 게 있는데
불교에도 그런 게 있습니까?”하는 거예요.
“있죠, 마구니라는 게 있습니다.”
제가 불교식으로 풀어서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탄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의 입장에선 사탄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무지한 중생에 의해서 나온 게 사탄입니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완벽한 곳에서는 원래 불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 부분을 불교는 이렇게 해석이 가능한데
기독교에서는 해석을 못합니다.
불교에서는 하나님 자체를 인정 안 합니다.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라만상 우주도 마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도 마음이 만들은 거죠.
제가 얼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보고
“하나님은 우주를 알고 만들었습니까, 모르고 만들었습니까?”하니까
“모르고 어떻게 만듭니까, 알고 만들죠.”
“그러면 마음의 특성이 뭔줄 아십니까?”하니까 모른데요.
제가 친절하게 얘기 해 줬습니다.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알고 만들었다면, 하나님 속성이 뭡니까?”
이러니까 아무소리 안 하는 거예요.
하나님 속성이 뭡니까?
마음, 아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도 마음에 의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창조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아주 묘한 겁니다.
여기 얘기가
어떻게 해서 자성이 청정한 깨끗한 마음에
바르지 못한 생각이 나오느냐 이거에요.
이 이치를 아셔야 되요.
자성 청정심이나 깨끗지 못한 생각이나 똑같습니다.
자성 청정심에서 바르지 못한 생각이 나왔기 때문에
그게 똑같이 자성 청정심 모습이에요.
그런데 왜 바르지 못한 법이 나올까요?
바르지 못한 생각이 있으면 번뇌의 업이 생기고
번뇌의 업에 의해서 바로 오온 십팔계가 존재하죠.
오온 십팔계를 가지고 있으면 뭐가 생깁니까?
결합되어 있는 것은 반드시 해체되죠?
해체되는 과정에서 뭐가 생긴다고 그랬죠?
병이 생기죠. 고통입니다.
오온 십팔계는 고통, 괴로움을 얘기 합니다.
괴로움은 어디서 왔느냐? 번뇌에서 왔다.
번뇌는 어디에서 왔다? 무지에서 왔다.
그럼 무지는 어디에서 왔느냐?
자성 청정심에서 왔다 이겁니다.
결국은 내가 괴로우니까 바르지 못한 생각 무지가 있다 이런 얘기에요.
자 정리 합시다.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근원은 자성 청정심이고
또 그 모습도 자성 청정심입니다.
그럼 자성 청정심이 나타난 모습이 뭐라 그랬죠?
바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바르지 못한 생각이죠.
바르지 못한 생각은 번뇌고, 번뇌는 오온이죠.
오온은 괴로움, 고(苦)죠.
고통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정신작용을 하니까 고통이 오죠.
그게 오온이에요.
그 오온은 어디에서 왔느냐? 번뇌에서 왔죠.
번뇌는 어디에서 왔죠? 바르지 못한 생각,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는 것.
그게 뭡니까? 자성 청정심.
자성 청정심을 다른 말로 하면 공, 중도라 그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르지 못한 생각, 무지든 번뇌든 오온이든 고든
전부다 자성 청정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성 청정심을 왜 무지라고 그러느냐.
이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고통스럽다, 고통이라는 것이 오온에서 오고,
오온은 번뇌에서, 번뇌는 무지에서 왔고
무지는 자성 청정심이다,
그런데 내가 고통스럽다 하면
그 고통에 의해서 자성 청정심의 모습은 자성 청정심으로 보이지 않고
바로 무지로 보이는 거예요.
이게 나쁜 놈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해가지고
무지가 사라져 버리니까 번뇌가 사라져 버리고
고통도 다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다 사라져 버리니까 무지니 번뇌니 오온이니 고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니까 착각, 환인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 거죠.
깨닫고 보니까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는 생각이 다 나쁜 것이고 안 좋은 것이다 이랬는데
깨닫고 보니까 생각이 번뇌가 아니고
전부다 자성 청정심의 작용인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고통 자체가 자성 청정심이에요.
즐거움도 자성 청정심이고 모든 게 자성 청정심 아닌 게 없는데
우리가 고통을 싫어하니까
자성 청정심을 보고 나쁜놈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깨닫게 되면
인간 육체를 갖고 태어났다하더라도 문제 될 게 없죠.
성품에서 삿된 생각 일어나면은
생각에서 번뇌 업을 불러 온다네
오음 육입 십팔계를 능히 일으켜
수상행식 오음 법에 의지하나니
육근 육입 십팔계 등 일체법에서
중생의 모든 근이 생멸하도다
세계가 이뤄지고 허물어지듯.
앞에서는 오온 육근 십팔계가 번뇌,
번뇌에서 잘못된 생각, 잘못된 생각에서 자성 청정심으로 들어왔죠.
그 다음에 반대로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삿된 생각에서 번뇌로, 번뇌에서 오온 육입 십팔계,
오온 육입 십팔계에서 일체법,
일체법 이게 모든 근이 생멸한다고 했죠.
여기에 ‘중생의 모든 근’은 몸을 얘기합니다.
몸이 생멸한다 그랬습니다.
청정한 마음은 허공과 같아
결정된 인이나 연이 없으며
서로 섞여 화합하는 이치도 없고
생하고 머무르며 멸함도 없다.
‘청정한 마음은 허공과 같아
결정된 인이나 연이 없으며’
청정한 마음은 허공 같이 텅 비어가지고
결정된 원인이 없고 결정되어 있는 연이 없다 이겁니다.
결정된 원인은 직접원인이고,
결정되어 있는 연은 간접원인입니다.
직접원인과 간접원인이라는 게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 말이에요.
불교에서는 인과응보설을 얘기 하더라도
딱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전생의 업에 의해서 이런 결과를 받을 것이라는 게 정확하게 나타나지만
그 순간 자기가 반성을 해서 참회를 하고 선업을 짓고 그러면
과보를 받긴 받는데 방향이 살짝 틀어질 수가 있다 이거죠.
얼마든지 조건에 의해가지고 바뀔 수가 있는 거죠.
그게 결정되어 있지 않아요.
‘서로 섞여 화합하는 이치도 없고’
인연이 아니다 이거죠.
‘생하고 머무르며 멸함도 없다.’
자성 청정심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생겼다, 머물렀다, 소멸했다 이런 현상이 아니죠.
그런데도 중생업이 가해지면 뭐가 막 생기기 시작하죠.
그 다음에
비어 있는 허공 같은 청정한 마음
언제나 뚜렷하여 변함이 없네.
중생이 허망하게 분별함으로
이 마음에 객진번뇌 물이 든다네.
또 이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다섯 가지 현량식은 부동하므로
오로지 의식으로 분별한다네.
‘비어 있는 허공 같은 청정한 마음
언제나 뚜렷하여 변함이 없네.’
이 세계가 변함이 없다는 말은
삶과 죽음이 없는 열반, 니르바나를 얘기하는 겁니다.
바로 이 세계는 정토이기도 하고 극락이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천국이기도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자성 청정심이에요.
알고 보면 따로 지옥이나 천국이 있는 게 아니고
따로 정토가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 마음의 자성 청정심이 회복되는 순간
바로 그 자리가 정토고 극락이고 천국이에요.
이 자리는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자리고 죽지 않는 거예요.
이것을 대구사람들은 한결같이 ‘대낄(大吉)이다’합니다.ㅎㅎㅎ
‘중생이 허망하게 분별함으로
이 마음에 객진번뇌 물이 든다네.’
분별한다는 것은 있다, 없다, 크다, 작다, 좋다, 싫다 이렇게 분별하니까
내 밖에 따로 뭐가 있는 것 같이 생각 되는데
그런 생각이 사실 알고 보면 전부다 번뇌다 이거예요.
객진, 객은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고 진은 티끌이죠.
이 객이라는 게 티끌 같이 그렇다는 겁니다.
‘또 이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다섯 가지 현량식은 부동하므로
오로지 의식으로 분별한다네.’
현량은 직관을 얘기하는데
다섯 가지 현량식이라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에요.
이 다섯 가지 감각은 분별 안합니다.
의식이 분별하는 거죠.
그래서 이 의식만 딱 잡아버리면
의식을 통해 들어온 이 정보가 아뢰야식에 저장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의식을 잡기 위해서는 기본 적으로 몸이 사라져야 되요.
몸이 허공처럼 텅 비어버려야만 의식이 잘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의식을 관찰해 들어가면
번뇌가 서서히 없어져 가면서 의식이 지혜로 전환이 되는 거예요.
다음 시간에는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의 분별’인데
더 구체적으로 현실감 있게 공부를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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