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청정한 마음경계 허공과 같다 (강의 - 2. 자성 청정심)

경호... 2011. 9. 13.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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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청정한 마음경계 허공과 같다 (강의 - 2) 또 다른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 가운데 무심하게 알아지면은 허공 속의 아지랑이 비슷하다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안다고 하나 한 가지 법이라도 알지 못한다. 이 가운데 무심하게 알아지는데 그게 허공 속에 아지랑이 같다 이거죠. 우리가 아스팔트 도로나 사막을 보다보면 멀리 허공 가운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데 사실 가까이 가보면 있는 것 같아도 없죠. 예를 들면, 혜가스님이 달마스님에게 “제 마음이 불안한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찾아도 없습니다.”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있는데 찾아보면 실체도 없고 자아가 없기 때문에 딱 꼬집어낼 수 없는 거예요. 그런 불안한 마음상태가 마치 허공 속에 아지랑이와 같은 거죠. 그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모양과 색깔이 객관적으로 자립해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마모되고 부서지고 존속이 안 되니 있다고 할 수 없는 거죠. 마치 아지랑이 같다는 거죠. 그래서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안다고 하나 한 가지 법이라도 알지 못한다.’ 이랬습니다. 그 다음에 『구경일승보성론』 게송에서 말하였다. 세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 허공에 의지하여 생멸하듯이 청정한 무루계에 의지하여서 중생의 모든 근이 생멸한다네. 여러분들은 모양과 색깔을 보고 있지만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덧붙여서 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감정과 생각을 모두 걷어버리면 인식이 된다고 하는 모양과 색깔은 존재할 수가 없죠. 감정과 생각을 덧붙였을 때 모양은 어떻고 색깔 어떻고 하는 분별을 낼 수 있는데 그것을 모두 걷어버렸을 때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거고, 변화 속에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잡아낼 수 없다는 것이죠. 실제 수행해서 시각이 멈춰져 버리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후각이 멈춰지면 냄새를 못 맡고, 미각이 멈춰져버리면 맛을 못 느끼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모양과 색깔은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청정한 무루계에 의지하여서 중생의 모든 근이 생멸한다네.’ 무루는 샘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에 눈, 귀, 코, 혀 이런 것은 구멍이에요. 대상을 인식하는 통로죠. 이 통로[인식]가 대상이 소멸해 버리니까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인식이 중지되는 거죠. 그러니까 흘러가는 게 없는 거예요. 흐름이 있다가 그쳐졌으니까 무루입니다. 계라는 것은 그런 세계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세계에 의지해가지고 중생의 모든 근이 생멸한다는 거죠. 생멸한다는 것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죠. 생멸하는 것은 일정한 모양과 색깔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생멸하는 세계하고 청정한 무루계하고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본질이 같은 겁니다. 다만 생멸하는 것을 우리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이겁니다. 여기 물이 있습니다. 물은 H²o, 수소 하나에 산소 둘이 모여서 된 것인데 물의 본질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거죠. 이것을 사람은 물로 보지만 아귀나 축생이나 천상에 신은 전혀 다르게 본다 이거죠. 이런 물 자체의 성품은 텅 비어있는 것이지만 내 업(karma)에 의해가지고 그 텅 빈 성품하고 결합을 하게 되면 업의 영향을 받아서 텅 비어 있는 성품이 각각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렇듯이 흙, 물, 불, 바람, 허공은 실체가 없는 심리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5대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우주 만물이 심리적인 겁니다. 그래서 모양과 색깔은 원래 없는데 마음이 만들어낸 거죠. 이게 ‘오직 마음밖에 없다’는 유식(唯識)이에요. 지금까지 얘기하는 것은 본질이 비어있다고 분명히 얘기 하는 겁니다. 허공은 불길로 태울 수 없어 허공을 태운다면 옳지 못하네 이와 같이 늙고 아파 죽는다해도 청정한 저 불성은 태울 수 없다. 부처의 성품은 자성이 청정한 무루의 세계죠. 텅 비어 있는 거죠. 그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순간에도 부처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 거죠. 모닥불을 피우면 불이 타올라서 허공에 불꽃이 잠시잠깐 머물다 사라져도 허공은 역시 바뀌지 않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성 청정한 마음에는 번뇌가 일어나서 번뇌의 불길이 타올라도 청정한 마음은 안 바뀐다는 겁니다. 다만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그 업이 가해져서 불길이 일어날 뿐이지 본질은 안 바뀐다는 거죠.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자성 청정심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번뇝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주객이 없는 공(空)자리가 자성이 청정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자성 청정하다는 것은 바로 번뇌를 상대해서 하는 얘기죠. 번뇌가 아무리 늙는다, 병들어 아프다, 죽는다고 덮어 씌워도 자성은 청정한 겁니다. 왜냐하면, 수행하는데 있어서 병들어 아프면 아픔을 지켜봐라, 아픔이라는 것을 일으키는 주체가 있나? 없다. 그럼 아픔이라는 그 자체가 머물고 있느냐? 머물지 않는다. 실체가 없다는 거죠. 늙음도 아픔과 똑같고, 죽음도 아픔과 같이 실체도 없고 그 자체는 머물지 않는다 이거죠. 그렇게 되면 늙고 병들고 죽음을 통해서 늙음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는 자성 청정심을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음은 자성 청정심하고 다르지 않고 같은 겁니다. 다만 그 불성을 우리는 업이 발동해가지고 늙음으로 아픔으로 죽음으로 올 뿐이에요. 업 자체를 살펴보면 그 본질은 자성 청정심이에요. 그래서 먼저시간에도 얘기 했지만, 『금강경 오가해』보면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 위를 지나갈 수 없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 위를 지나갈 수 없고, 쇠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위를 지나갈 수 없다. 그럼 무엇이 부처인가, 물로 끼얹어도 젖지 않는 게 부처요, 불로 태워도 타지 않는 게 부처요, 용광로에 넣어도 녹지 않는 게 부처다, 이랬습니다. 어떤 형상이 있다면 젖는다든지 탄다든지 녹는다든지 이러는데 상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음성으로서 나를 찾거나 형상으로서 나를 찾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삿된 길로 가는 자이니 부처를 보지 못하리라’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양과 색깔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기 때문에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만나는 순간순간 자성 청정심을 만날 수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