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종경(宗鏡)은 살아 있는 법문 (강의 - 2. 모든 것이 不二의 道에 계합한다)

경호... 2011. 9. 11. 04:26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종경은 살아 있는 법문 (강의 - 2) 이 몸은 언제나 아는 게 없어 초목이나 기왓장 비슷하다네 깨달음은 형태와 색깔이 없고 적멸은 언제나 불생이라네. ‘이 몸은 언제나 아는 게 없어 초목이나 기왓장 비슷하다네’ 초목이나 기왓장처럼 생각이 안 일어난다는 거죠. 그럼 ‘이 몸은 아닌 게 없다’ 했는데 아는 게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봐야 되겠죠? 자, 손들어 보세요. 손가락을 제치세요. 뭐가 아프죠? ㅎㅎㅎ 마음이 아프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왜 안합니까? ㅎㅎㅎ 손가락은 아는 게 없죠. 그래서 몸은 아는 게 없는 거예요.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사람들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몸져 누워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제자들 보고 문병 갔다 오라고 하니까 10대 제자가 “아이고, 유마거사는 법력이 높아서 우리들은 상대가 안 됩니다.”이러니까 “문수보살 당신이 가서 문병하고 오시오.” 그래서 문수보살이 문병 가는데 “야, 유마거사하고 문수보살이 붙으면 굉장할 거다.” 하면서 수많은 보살과 성문, 천자들이 따라 가는 거예요. 이때 유마거사는 문수보살이 여러 제자를 인솔하고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신통력을 발휘해서 자기 방을 텅 비게 하고 오직 침상 하나만 방에 남겨두고 그 침상위에 딱 앉아 있는 거예요. 문수보살이 도착해서 “어찌 이렇게 병이 나셨습니까?”이러니까 “몸은 일어나도 일어난다는 생각이 없고 일어났다고 하는 내가 없고, 몸은 사라져도 사라진다는 내가 없습니다. 문수보살이여! 몸은 아는 성질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몸이 기왓장이나 초목과 같은 거예요. 죽으면 몸이 썩어서 지수화풍 4대로 다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깨달음은 형태와 색깔이 없고’ 깨달음이 뭐냐 하면, 손가락을 제치면 그 전에는 손가락이 아프다고 했는데 마음이 아프다고 깨달았죠? 그럴 때 아는 앎은 모양과 색깔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바로 그거에요. 손가락의 아픔이 마음이고 그것도 모양과 색깔이 없는데, 하물며 깨달음 속에 무슨 형태와 색깔이 있습니까. ‘적멸은 언제나 불생이라네.’ 적멸은 번뇌가 고요해져서, 고통과 고통의 원인이 소멸했기 때문에 고요하다는 거죠. 적멸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래서 불생이라는 겁니다. 몸뚱아리 깨달음과 상관이 없고 깨달음도 이 몸과 관계를 않네 마음은 깨달음과 상관이 없고 깨달음도 마음과 관계 없으나 서로서로 관계를 있게 하나니 진실로 이 일은 부사의라네. ‘몸뚱아리 깨달음과 상관이 없고’ 몸뚱아리는 모양과 색깔이 있고 깨달음은 모양과 색깔이 없으니까 서로 상관이 없죠. ‘마음은 깨달음과 상관이 없고’ 깨달음과 마음은 관계가 없어요. 깨달음도 마음이고 마음도 마음이고 하난데 무슨 관계가 있어요. 상대해야 관계가 있는데 상대를 떠나 있기 때문에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고, 그 다음에 마음은 주객이 만나면 일어나죠. 이 마음은 선한마음, 악한마음, 미혹의 마음이 있는데 깨달음은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이 미혹의 마음과 깨어있는 마음은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보통 우리의 마음은 과거나 미래를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인데, 깨어있는 마음은 부동의 마음이에요. 하지만 마음에서 깨달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 관계를 갖고 있다 이거죠. 선정이라는 마음이 바탕이 될 때 깨달음이 생깁니다. 그러니 관계가 있죠. 그 다음에 몸하고 깨달음하고 관계없는 것 같아도 관계있습니다. 몸뚱아리가 없으면 깨달을 마음이 안 생깁니다. 몸이 아프고 힘드니까 고통의 실체를 어쨌든 깨쳐보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서로서로 관계를 있게 하나니 진실로 이 일은 부사의라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을 풀이해 보자. 이 게송에서 색(色)이 눈에 오지도 않고 귀가 소리에 도달하지 않아도 보고 듣는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성을 떠난 가운데에서 현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색(色)은 모양과 색깔인데 이것을 눈으로 봤다는 게 아니죠. 소리도 귀가 따라가는 게 아니죠. 그래도 보고 듣고 하는 게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성을 떠난 가운데에서 현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자성[실체]을 떠났다지만 현현한 것이 있다. 이 말은 빈 골짜기는 아~ 하면 메아리는 돌아오듯이 비어 있지만 현현한 게 있죠.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이니 육근(六根)에 상대가 없는 모든 것은 다툼이 없다는 법문이다. 모든 경계가 허공을 머금어서 모든 것이 다 불이(不二)의 도(道)에 계합한다. 곧 지금의 중생 경계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어찌 멀리서 모든 성인의 작용을 구하고자 하여 스스로 비열하고 하열한 자가 될 것인가. 육근이 비어 있다면 육진도 비어 있죠. ‘모든 경계가 허공을 머금어서’ 입안, 귓구멍, 콧구멍, 혈관, 위장.. 다 비어 있죠. 이렇게 여러분 몸은 허공을 머금고 있어요. 수행을 해보면 몸이 사라지는 현상이 허공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불이(不二)의 도(道)에 계합한다.’ 성질이 여러분도 비어 있고 저도 비어 있다면 여러분과 저의 관계는 둘이 아닌 관계죠. ‘곧 지금의 중생 경계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어찌 멀리서 모든 성인의 작용을 구하고자 하여 스스로 비열하고 하열한 자가 될 것인가.’ 깨달음, 진리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안에서 구해라. 보조스님도, 달마스님도, 부처님도 이것을 얘기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를 외도(外道)라고 안하고 내도(內道)라고 그러는 겁니다. 밖에서 신을 구하는 종교를 전부 다 외도라 그럽니다. 이 종경은 중생의 어리석고 어두운 면을 비춰주는 것으로 모든 부처님의 광명과 같다. 법계 중생이 일시에 원만한 깨달음을 증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종경은 거울, 비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법계 중생이라는 게 십법계 중에서 부처님 외에 보살까지 합해서 아홉 개의 법계는 중생입니다. 그런데 일시에 원만하게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을까. 공의 세계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죠. 그래서 중생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무조건 공(空) 속에 있습니다. 그런 공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중생들도 원만하게 깨달음의 성품이 다 있는 거죠. 이것은 『법집경』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세존이시여, 눈과 색 두 가지 법이 다투고 경쟁할 게 없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 도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섞이지 않고 도달하지 않는 모든 법은 거역하거나 다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법에는 두 가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다툴 것이 없습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해되시죠? 조금 더 지나면 유식에 어려운 부분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무루종자, 번뇌가 없는 종자인 법문을 들어서 마음에 저장이 되면 이 저장 된 종자가 유루종자, 번뇌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루종잡니다. 이 게 쌓이고 쌓이면 지가 알아서 발아가 되어서 그동안에 막히고 단절되어 있는 것들이 서로 소통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법문을 거듭해서 듣게 되면 어느 순간에 그것은 전에 몰랐는데 자고 일어나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법문 듣기만 해도 지혜가 생긴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남편 난도질하는 얘기 하지 말고 유식가지고 수다를 떠세요. 아셨죠?ㅎㅎㅎ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