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지운스님 강의 : 『唯識』- 인명(因明)은 파사현정(破邪顯正)하게 한다. (강의 - 2. 인명因明)

경호... 2011. 8. 24. 01:15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인명(因明)은 파사현정(破邪顯正)하게 한다. (강의 - 2) 잘못된 점을 타파하고 바른 이치를 세우는 것으로서 종지를 삼는다. 언어에서 지혜가 생겨난 것으로서 바탕을 삼는 것이다. 언어에서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은,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서 지혜가 생겨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래서 인명에서는 이렇게 얘기 합니다. 깨닫는데 있어서는 현량(琅量, 직관)과 비량(比量, 추리), 두 가지 수단이 있다. 여러분들은 이런데 걸릴 수가 있죠. ‘사량 분별 하지 말아라’ ‘화두 참구하는 데 사량 분별은 독이고 번뇌다’이렇게 분별 못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추리를 못하죠. 중국에 선이 발달이 됐는데 반면에 인명이라는 유식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어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 문자가 상형문자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직관적이고 사실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직관은 발달 되어 있는 반면 추리는 발달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인명이나 유식 같은 것이 발전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반면에 직관을 하는 간화선, 선이 굉장히 발달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분명히 얘기를 해야 될 게 있습니다. 깨닫는 데는 현량(직관)과 비량(추리), 두 가지 수단이 있다고 했어요. 현재 우리 간화선 풍토에서는 직관은 발달되어 있는데 추리는 맥없이 끊겨 버렸어요. 분별하는 것을 무조건 금지사항처럼 그렇게 여겨지는데 이것이 조금 오해가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경론에서의 수행은 그 대상이 법(法)이고 어록에서의 수행을 얘기할 때에는 성(性)이에요. 이게 다른 점입니다. 법성(法性)할 때 이 성(性)이라는 것은 『화엄경』에 분명히 무분별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품 성(性)자, 불성이나 법성이니 하는 성에 들어가려면 무분별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화두를 들어야 됩니다. 화두를 들어서 ‘이것이 무엇인가?’‘왜 개는 불성이 없다 했을까?’ 계속 의문부호를 붙여야 되요. 그렇게 되면 마음이 순수한 무분별 상태로 들어가거든요. 그런 상태를 은산철벽(선정상태)이라고 하는데 화두 삼매를 얘기합니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만 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불생불멸 열반에 이르려면 일어나고 사라지지 않는 불생불멸의 마음으로 가야 된다. 생멸하는 마음으로는 불생불멸의 자리에 이를 수가 없다.’ 이게 『능엄경』에서 하는 얘깁니다. 여기서 불생불멸하는 마음은 직관입니다. 추리는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놈이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는 거길(불생불멸의 바리) 못 들어가는 거예요. 맞는 얘깁니다. 그래서 어록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는 것이 간화선이에요. 그럼 경론에서 얘기하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보통 간화선을 사마타[止] 위빠사나[觀], 지관쌍수(止觀雙修)라 얘기 하는데 여기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대상이 법이에요. 법이라는 것은 인연소생 왈 법이에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이 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유가 필요합니다. 『화엄경』에 ‘일체 연기법은 사유 관찰해야 된다’는 말이 나와요. 관찰은 직관인데 사유가 들어간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찻잔에 대해서 전 시간에도 얘기 했는데 한 번 더 얘기 하면, 여러분들이 이것을 눈으로 보면 실체가 없다든지 비어있는 부분이 보입니까? 안보이죠. 실체가 없고 비어있다고 하는데 전혀 안보이잖아요. 그냥 모양과 색깔로 보이죠. 이럴 때 실체 없고 비어있다는 것을 알려면 비량(比量), 추리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깨닫는 방법 두 가지 중에 비량이 들어가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럼 추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종(宗), 인(因), 유(喩)로 해야 되겠죠. 이 찻잔은 모양과 색깔은 있지만 비어있다. 왜 비어 있느냐? 깨지니까. 만들어졌으니까 깨진다는 거죠. 깨지니까 실체가 없다 이거죠. 비유를 들자면, 도공(陶工)이 만든 찻잔은 지수화풍 4대로 된 거죠. 만든 것은 반드시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찻잔이 부서지듯이. 다시 얘기하면, 이 찻잔은 실체가 없다, 이유는 부서지니까. 이렇게 논리가 분명한 거예요. 이런 논리로 얘기하면 머리 아프니까 간단하게 얘기 하자면, 도공이 흙에 물을 섞어서 모양을 만들고 색칠을 하고 불에 구워서 형태가 만들어지는 거죠. 만들어진 것은 깨지고 깨지는 것은 실체가 없다, 맞죠? 그러면 이렇게 추리한 다음에 또 추리할 필요가 없죠? 추리한 결과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거죠. 실제로 수행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실체 없음이 눈으로 확인이 가능해요. 투과가 되면서 비어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대승불교 수행에서는 특히 위빠사나, 추리가 등장한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인연생멸 하는 것을 잘 분별하는 게 위빠사나다. 여기서 분별은 추리나 분석하는 것을 얘기 하는 겁니다. 추리나 분석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분석, 추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직관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대승에서의 수행은 제일 처음에 몸이 사라지고, 두 번째 마음 소멸이 일어나고, 마음이 소멸하면서 마음이 비어 있는 것을 봐요. 이 비어있는 것을 직관하게 되면 선정이 생깁니다. 다시 선정에 의지해서 그때 추리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선정에 의해서 추리하는 것은 자아가 없는 추리에요. 나를 근거해서 하는 추리는 가짭니다. 그래서 선정에 의해서 추리해가지고 철저하게 공을 분석을 합니다. 이렇게 공을 분석을 해서 한 점 의혹도 없이 의심이 다 사라지면 다시 직관을 합니다. 직관을 하면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것을 증입(證入)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공의 세계에 들어가면 견도위(見道位)입니다. 그때가 견성(見性)이에요. 견성이 성불일 수도 있고 다시 닦아야 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일 수도 있다. 그때의 깨달음을 증지(證知)라 그럽니다. 결국 끝에는 추리를 안 쓰고 직관에 들어가죠. 과정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일 마지막, 직관에 들어간다. 직관에도 두 종류가 있어요. 이것이 수행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입니다. 감각적 직관은 수행적 직관이 아닙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직관인데 이런 감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수행적 직관이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를 합니다. 수행적 직관은 알아차림(정념)으로 하는 겁니다. 정념은 육안이 아닌 심안(心眼)이기 때문에 감각적 직관이 아니죠. 이 알아차림은 다른 말로 반조(返照), 되비춰보는 것인데 되비춰 보는 게 있을 때 그것은 수행이고 되비춰 보는 게 없으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감각적 직관은 되비춰 보는 거울이 될 수 없지만 알아차림, 마음 챙김이라고 번역하는 정념은 되비춰 보는 거울이 됩니다. 이해가 되셨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는 언어에서 지혜가 생겨난다는 말은 이런 추리를 통해서 ‘아! 그것은 실체가 없구나’하는 지혜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초기경전』이나 『아함경』이나 『대승경전』에 보면 명상에 있어서 문(聞)·사(思)·수(修), 문(聞), 들으면서 지혜가 생기는 것, 사(思), 법을 깊게 사유하면서 지혜가 생기는 것, 수(修), 닦아서 일어나는 지혜, 이 세 가지를 얘기 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인연소생인데 다시 한 번 봅시다. 이것은 찻잔인데 이것을 법이라 그럽니다. 지수화풍 4대가 인연으로 화합해서 생긴 것이니까 법이다 이거죠. 여러분 아이들 있죠? 부부에 합작품이 아이들입니다. 부부는 인연이고 그 아이들은 법입니다. 결혼하는 두 남녀를 보고 천생연분이라 그러죠. 옷깃만 스쳐도 오백생 인연 있는데 두 남녀가 만났으니 오백생 더하기 오백생하면 천생이죠. 한 생을 60년 잡으면 천생은 몇 년입니까? 몇 만 년 되죠? 그러니까 두 남녀가 결혼해서 사는 것은 몇 만 년의 인연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고 그 아이를 법이라 그럽니다. 예를 들면, 미아가 있는데 사람들이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경찰들이 그 아이를 조사하겠죠. 그런데 그 아이는 법이죠. 법을 조사하면 뭐가 나오죠? 인연, 부모가 나오겠죠. 추리라 하는 게 그런 겁니다. 이렇게 경찰관이 아이를 조사 하듯이 이 법이라고 하는 찻잔을 조사해 보면 지수화풍 4대라는 부모를 만나게 되죠. 그래서 아! 이것은 실체가 없다, 자아가 없다, 고정된 게 아니다, 이런걸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생각을 많이 하는지 보면, “사량 분별하면 안 된다.” 이런 것에 너무 길들여가지고, 대화하는데 장애가 많이 생깁니다. 사량 분별하지 말라는데 너무 익숙해져 가지고 대화가 잘 안됩니다. 상대가 얘기하면 그에 대해서 분석해가지고 원인이 뭔지, 조건이 뭔지, 결과가 뭔지 이런 것을 잘 밝혀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두루뭉실해가지고 감정만 상해서 화만 벌컥 내고 말아요. 이런 것은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논리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간화선의 영향인지 잘 모르겠지만, 간화선도 제대로 하려면 네 가지 사상을 철저히 알아야 하거든요. 첫째 반야, 두 번째 유식, 세 번째 불성, 네 번째 화엄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무엇이 서있어야 됩니다. 이 공부를 다 하게 되면, 불법에 대해서 논리적인 체계가 쫙 서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전제에서 ‘사량 분별 하지 마라’하는 가르침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이 ‘사량 분별을 하지 마라’고 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불교수행은 디야나(ध्यान dhyāna), 번역하면 한문으로 선나(禪那), 그것을 번역하면 사유수입니다. ‘선을 닦는 것은 사유로서 닦는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예를 들어 몸을 관찰 대상으로 한다, 감각을 관찰 대상으로 한다, 이게 아니고 화두를 대상으로 한다. 화두가 뭐겠어요. 본질에 관계된 것인데 거길 들어가려면 사유수부터 해야 하는 거예요. 사량 분별의 사유수가 아니고 생각은 생각인데 화두 잡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은, 법문을 들으면서도 지혜가 생기지만, 법에 대해서 깊이 사유를 통해서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이나 논서는 바로 법을 이야기합니다. 법을 사유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럼 법이 무어냐. 『화엄경』 첫머리에 보면, “일체법에 대해서 최정각을 이룰 수 있는 분이 부처님이다.” 일체에 대해서 최정각을 이루었다. 일체법에 '일체'는 모든 것인데 '법'자가 붙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인연소생 왈 법이다. 인연소생이 곧 법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직접 원인과 간접 조건이 만나면 결과가 생긴다는 거죠. 결과가 생기는 그것이 법이라는 거죠. 땅에 콩을 심으면 콩이 직접원인이고, 흙이나 물이 햇빛이나 이것은 간접조건 됩니다. 이것이 연입니다. 직접원인인 콩과 간접원인인 흙, 물, 햇빛에 의해 콩이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를 가지고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다 시집, 장가를 갔죠? 집에 애들 다 있죠? 부부는 인연이고, 자식은 인연에 의해 소생한 법입니다. 그 법이 시집, 장가가면 또 다시 법을 만들어내죠. 이런 모든 일체의 것은 법 아닌 게 없다, 이 법에 대해 소상하게 깨달으신 분을 부처님이라 하고, 그 깨달음을 최정각, 최고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위 글에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 법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연소생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이 법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인연생멸하는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위빠사나라고 했습니다. 분별이 뭡니까, 사유분별이죠. 뭘 사유분별 해야 하느냐. 인연생멸, 직접원인과 간접조건이 만나면 생기고, 소멸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위빠사나는 지혜를 가져다 주죠. 대승 위빠사나는 반드시 사유가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렵죠? 조금 쉬운 얘기를 해야 하는데 선생 잘못만나서 좀 힘들 겁니다. 이 부분만 지나면 다음부터는 쉬워질 거예요. ‘언어에서 지혜가 생겨난다’는 말이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범부와 소승이 갖는 잘못된 집착을 꺾고, 불법의 뼈대되는 종지를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가르침은 원만하지 못하다. 목공 일에 먹줄이 아니면 나무를 곧게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목수들은 먹줄이 없으면 나무 일이 잘 안되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목공 일에 먹줄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혜를 말합니다. 비량(比量)에서 추론한다는 말[比]은 잘못된 것을 추려서 진실한 믿음을 생기게 하여 잘못된 의심을 조복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헤아린다는 말[量]은 바른 이치를 확정하여 미치광이 허망한 주장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비량(比量), 비(比)는 비교할 비자인데 비교해서 추리하는 것이죠. 잘못된 것을 다 없앤다는 것입니다. 량(量)자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대상 인식은 직관과 추리라고 했을 때 현량과 비량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정법의 수레바퀴가 영원히 굴러 가고, 유식의 뜻이 널리 행해질 수 있다. 곧 현상[事]에서 이치[理]가 드러나는 공능이 있으며, 말에 경계를 정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유식의 뜻이 왜 널리 행해질 수 있죠? 인명을 통해서 알 수가 있죠. 그러고 보니 오직 마음뿐이지 다른 경계가 없구나. 바깥 대상이라는 것은 실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는 없다는 거죠. 그럼 안에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직 마음뿐이요 다른 경계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마음이다, 이렇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식의 뜻이 널리 행해질 수 있다. 말에 경계를 정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결론과 원인과 비유, 이 세 가지의 삼단논법을 통해서 말하는 것을 정확히 그 뜻을 가려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의 경계를 정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이런 겁니다. 이것은 자은대사(AD 632-682)가 “인명론은 원래 부처님만 설하시는 것으로 문장이 광범하고 뜻이 흩어져 있으나, 모든 경에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불교는 굉장히 논리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 이유는 한 점 의혹이 없이 하려고 사유를 하는 거죠. 옛날에 한 번 얘기를 했는데, 부처님이 얼마나 말씀을 잘 하시는 지에 대해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이나 다른 스님이 하는 것을 보면 와! 하고 입을 벌릴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촌장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당신은 굉장히 자비스러운 분이시죠. 그런데 왜 차별을 하십니까? 당신네 제자들은 높은 법문 해주시고, 우리 같은 촌부들은 왜 낮은 법문을 하십니까. 당신은 자비스러운데, 왜 그리 합니까?” 이 촌장이 하는 논법은 양도논법[dilemma, 딜레마]입니다. 뱀이 있는데 머리가 두 개에요. A라는 뱀 머리를 치면, B라는 뱀이 무는 거죠. 잘못 건들면 물리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기가 막히게 잘 피해서 정확히 대답을 하세요.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옥답이 있고 중간 답이 있고 자갈밭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밭부터 갈겠습니까?” 그 촌장은 농부니까 당연히 “그야 옥답을 먼저 갈지요.”라 대답을 합니다. “그럼 옥답이 없으면요.” “중간 답을 갈지요.” “중간 답이 없으면요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자갈밭을 갈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 부처님 하시는 말씀이 “나도 그와 같다. 나의 제자들은 옥답이고 신자들은 중간 답이고, 외도는 자갈밭과 같다. 그러니 당연히 옥답인 내 제자들에게 심도 있는 법문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여러분은 자갈밭은 아니지만 중간 답 정도는 됩니다.ㅎㅎㅎ 말씀을 그렇게 잘하세요. 2003년도인가, 5월 말 즈음에 나닥(Ladakh)에 갔었습니다. 거기는 오지예요. 거기에 들어갔는데 첫 번째 간 절에 경찰이 상주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티벳의 젊은 스님 세 분이 총에 맞아 죽었답니다. 그 사연이 뭔가 하면 파키스탄 쪽 지역 사람들은 이슬람을 믿습니다. 이슬람 청년 세 명이 찾아와서 스님 세 분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스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분한 채 돌아간 청년들이 밤에 총을 가지고 와 스님들을 죽인 것이죠. 티벳의 스님들은 20세가 되기 전에 절에 들어가서 경전을 외웁니다. 회초리 맞아가며 경전을 외우고, 20대에 가면 경전에 대한 설명을 듣고, 30대에 가면 벌써 논서, 경전에 대한 것을 다 압니다. 논쟁하는 것도 보면 인명론, 불교인식논리학으로 논쟁을 벌입니다. 학습을 그런 식으로 하는데 얼마나 논리를 설명을 잘하는지. 달라이 라마 스님 얼마나 말씀 잘 하십니까? 굉장히 알기 쉽게 잘 말씀하시는데 논리가 굉장한 거예요. 이런 논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삿된 것을 잘라내고 바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거든요. 그런 사유가 바로 지혜란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