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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 이홍섭

경호... 2012. 7. 1. 18:04

 

 

 

 

 


무지개 / 이홍섭

 

서산 너머에서 밤새 운 자 누구인가
아침 일찍 무지개가 떴네


슬픔이 저리도 둥글 수 있다면
내 낡은 옷가지 서넛 걸어놓고
산 너머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겠다


아픔이 저리도 봉긋할 수 있다면
분홍빛 당신의 가슴에
내 지친 머리를 파묻을 수 있겠다

 

서산에 뜬 무지개는
당신의 눈물처럼 참 맑기도 하지

 

 

 

 

청단풍 아래 / 이홍섭

 

나는 불행하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앞산은 온통 붉게 물드는데

나는 여전히 푸르고

 

사랑하는 사람은 앞을 지나가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 붉은 가슴을 열어 보인들

당신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스스로 문을 연다는 정선 자개골, 그 골짜기

끝에 서 있는 청단풍 한 그루

 

나는 불행하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귀조경 / 이홍섭

 

일평생 나무만 길러온 노인이 말씀하시길, 조경 중에 제일은 귀조경이라 하신다.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 잘생긴 나무, 못생긴 나무를 두루 심어놓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이따금 이파리와 꽃잎의 맛을 보는 조경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 제일의 조경은 이 나무들이 철 따라 새들을 불러모으고,새들은 제 각기 좋아하는 나무를 찾아들어 저마다의 소리로 목청 높게 노래부르는 것을 듣는 일이라, 키 큰 나무를 심어 놓으면 키 큰 나무에만 둥지를 트는 새의 노래를 들을 것이요, 키 작은 나무만 심어 놓으면 키 작은 나무에만 날아오는 새의 노래를 들을 것이니, 그것은 참 된 귀조경이 아니라 하신다.

 

오래만에 봉창을 열고 목노인(木老人)처럼 생각하거니,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어떤 나무를 심어왔고, 내 정원에는 어떤 목소리의 새가 날아왔던가, 나는 또 누구에게 날아가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오늘처럼 봄날의 노래를 들려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