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 / 박이화
하수 / 박이화
한때 내 춤 스승님은
음악은 머리로 듣지 말라셨지
머리로 생각하며 추는 춤은
팔 다리가 느리고 무거워 음악에 끌려다니게 된다고
온몸 구석구석 음악이 배암처럼 스며올 때
비로소 능글능글 춤을 갖고 놀게 된다고
지난 내 검도 사부님은
시선을 칼끝에 집중시키지 말라셨지
두 눈이 매이면 생각이 매이고
생각이 어딘가에 붙들리면
검의 길을 알 수 없다고
그 때 일촉즉발, 상대의 칼날이 바람처럼 내 몸을 지나간다고
누구라도
꽃에 눈길 빼앗기는 순간 잎은 볼 수 없고
송두리째 향기에 마음 바친 동안은
커다란 꽃나무는 보지 못하는 법
그런고로
천하제일 춤꾼은 몸과 음악이 하나 된 사람
천하무적 검객은 몸과 검이 하나 된 사람
우리 사랑이 아직 하수인 것은
이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끝끝내 그 둘이 하나인 줄 모른 채
사랑 따로 이별 따로 생각하기 때문이지
궁극에선
춤은 오래 전 연인의 가슴속에서
검은 칼집 속에서 가장 고요히 아름답다는 걸
우리가 거기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 박이화
꽃 지고 나면 그 후는
그늘이 꽃이다
마이크도 없이
핏대 세워 열창했던 봄날도 가고
그 앵콜 없는 봄날 따라
꽃 지고 나면
저 나무의 18번은 이제 그늘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한 시절
목청 터져라 불러재꼈던 흘러간 노래처럼
꽃 지고 난 그 후
술 취한 듯 바람 등진 채
비틀거리며 휘청거리며 부르는 저 뜨거운 나무의 절창
그래서 저 그늘
한평생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거다
그늘만큼 꼭 그 젖은 얼룩만큼 나무는 푸르른 거다
설령 사랑도 꽃도
한 점 그늘 없이 피었다 그늘 없이 진다 해도
누군가 들었다 떠난 퀭한 자리마다
핑그르 눈물처럼 차오르는 그늘
꽃지고 난 그후는
모든 그늘이 꽃이다
마스카라 시커멓게 번진 검은 눈물꽃이다
내 안의 꽃 / 박이화
아무래도 저 검은 그림자 속엔
몸통 작은 여우 한 마리 살지 싶어
바람난 여자의 음부처럼 팽팽한
물오른 암여우 한 마리
천변만화의 둔갑술을 부리며 살지 싶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 거친 앙상한 골격으로
어찌 저리 미색의 꽃을 피울라고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지는 저 몰골
그럴수록 더 붉고 육색 좋은 꽃 피우는 저 나무,
속엔 분명 변득스런 사향여우 한 마리
色, 色 봄볕 희롱하며 살지 싶어
누구라도 단박에 홀려버리는 향기,
그 화사한 염문
천지간
난분분 난분분 꼬리무는
이 봄날
내 안에서도 분명
저 늙고 의뭉스런 복사꽃 한 그루 있어
마디마디 관절 우두둑 소리나는 마흔에
내 몸은 점점 열에 들뜨고
가끔은 입술보다 더 붉은 손톱으로
꽃잎처럼 선명히
그대 등을 할퀴기도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