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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 / 김세형
경호...
2012. 2. 8. 15:06
등신 / 김세형
사람의 등이 절벽일 때가 있다
그 절벽 앞에 절망하여 면벽하고 있을 때가 있다
아주 오래토록 절벽 앞에 면벽하고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그 절벽이 얼마나 눈부신 슬픔의 폭포수로 쏟아지는
짐승의 등인가를… 그리고 마침내는 왜?
그 막막한 절벽을 사랑할 수 밖에는 없는 가를 …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이의 등 뒤에 앉아
오래토록 말이 없이 면벽해 본 사람은 안다
난 늘 그렇게 절벽 앞에서 묵언정진 해왔다
내게 등 돌린 사람만을 그렇게 사랑하곤 했다
난 내게 등 돌린 이의 등만을 사랑한 등신이었다
사랑에 있어서 난 신(神)의 경지에 오른 등신이었다
<찬란을 위하여> 2011년 황금알
내가 널 가장 사랑하고 싶을 때 / 김세형
내가 널 가장 사랑하고 싶을 때
네가 어둠 속에 짐승처럼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
네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빠끔히 뜬 채
밤새 말없이 혼자 어둠의 깊이를 재고 있을 때
네가 그렇게 먼지탑 같은 형상으로 어둠에 쌓여 말없이 혼자 앉아있을 때
다가가 손끝 하나 만이라도 가만히 갖다 대면
하르르, 하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을 때,
그래서 내가 차마
네 곁에 바투 다가갈 수 없을 때.
시집 <사라진 얼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