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 황지우
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病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거룩한 식사 / 황지우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 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 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을 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그날그날의 현장검증 / 황지우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버렸다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처넣고 솜으로 막는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나의 일부를 파묻는다
나의 증거인멸을 위해
나의 살아남음을 위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 지성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