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下 - 제88칙 현사의 세가지병(玄沙三病)
경호...
2011. 10. 12. 00:28
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 벽암록 下
제88칙 현사의 세가지병(玄沙三病)
- [垂示]
垂示云. 門庭施設. 且恁麽. 破二作三. 入理深談. 也須是七穿八穴.
當機敲點. 擊碎金鎖玄關. 據令而行. 直得掃蹤滅跡.
且道淆訛在什麽處. 具頂門眼者. 請試擧看.
[수시]
선가에서 쓰는 솜씨는 둘을 쪼개어 셋을 만들기도 하고,
이치가 깊은 이야기를 산산조각내기도 한다.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묻고 답변하면서 쇠자물쇠와 현묘한 관문을 쳐부수고,
법령에 따라 시행하여 곧바로 자취를 쓸어 없애버린다.
말해보라, 어려움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정수리[頂門]에 안목을 갖춘 자라면 말해보아라.
[본칙]
擧. 玄沙示衆云, 諸方老宿, 盡道接物利生. 忽遇三種病人來, 作生接.
患盲者, 拈鎚拂, 他又不見. 患聾者, 語言三昧, 他又不聞. 患啞者敎伊說, 又說不得.
且作生接, 若接此人不得, 佛法無靈驗.
僧請益雲門. 門云, 汝禮拜著. 僧禮拜起. 雲門以杖, 僧退後, 門云, 汝不是患盲.
復喚近前來, 僧近前. 門云, 汝不是患聾. 門乃云, 還會. 僧云, 不會.
門云, 汝不是患啞. 僧於此有省.
거론하다.(擧.)
현사(玄沙)스님이 대중 법문을 하였다.
“여러 총림의 노스님들이 모두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하나,
(玄沙示衆云, 諸方老宿, 盡道接物利生.)
- 분수에 따라서 자리를 편다.
집안에 따라 넉넉하기도 하고 인색하기도 하다.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맞이하겠는가?
(忽遇三種病人來, 作生接.)
- 풀을 치는 것은 뱀이 놀라게 하려고 함이다.
산승은 (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헤벌쭉 벌렸다[目瞪口呿].
확실히 (나는) 3천 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봉사에게 백추(白鎚)를 잡고 불자(拂子)를 곧추세워도 그는 보지 못하며,
(患盲者, 拈鎚拂, 他又不見.)
- 분명히 눈이 멀었구나.
모든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
굳이 봉사에게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귀머거리는 일체의 어언삼매(語言三昧)도 듣지 못하며,
(患聾者, 語言三昧, 他又不聞.)
- 분명히 벙어리군.
모든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
굳이 귀머거리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람이 듣지 못하느냐?
벙어리에게는 말을 하도록 시켜도 하지 못한다.(患啞者敎伊說, 又說不得.)
- 분명히 벙어리군.
모든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
굳이 벙어리에게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이 말하지 못하느냐?
이들을 어떻게 맞이할까?
만일 이들을 제접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
(且作生接, 若接此人不得, 佛法無靈驗.)
- 진실하다, 이 말이여! 산승은 두 손 번쩍 들고 항복했다.
이미 제도해버렸다. 쳐라.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청하자,(僧請益雲門.)
- 총림이 다 함께 알아야지. (질문) 잘했다.
“절 좀 해봐라.”(門云, 汝禮拜著.)
- 바람이 부는 데로 풀이 쏠리는구나. 쯧쯧!
스님이 절을 올리고 일어나자,(僧禮拜起.)
- 이 스님이 (자신의) 체면을 꺾는 꼴이 되었군.
운문스님이 주장자로 밀쳐버리니[挃], 스님이 뒷걸음질 치자,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너는 눈멀지는 않았군.”(雲門以杖, 僧退後, 門云, 汝不是患盲. )
- 분명히 눈이 멀었다.
스님이 눈이 멀었다고 말하지 않았어야 좋았을걸.
다시 그를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여 스님이 다가오자,
(復喚近前來, 僧近前.)
- 두번째 바가지의 똥물을 뿌리는구나.
(소리 듣고 오는 것을 보니) 관음보살이구먼.
당시에 일갈(一喝)을 했어야 했는데…….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귀머거리는 아니군.”(門云, 汝不是患聾.)
- 분명히 귀가 먹었다.
이 스님에게 벙어리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어야 좋았을걸.
운문스님이 “알았느냐”고 말하자,(門乃云, 還會.)
- 왜 본분납자를 길러내는 먹이를 주지 않았느냐.
당시에 대답하지 않았어야 좋았을걸.
“모르겠습니다”하니,(僧云, 不會.)
- 두 번 거듭된 공안이다. 아이고, 아이고!
“너는 벙어리는 아니군”하였다.(門云, 汝不是患啞.)
- 분명한 벙어리이다. 어버버하는군.
이 스님이 벙어리라고 말하지 않았어야 좋았을걸.
스님이 이에 알아차리는 바가 있었다.(僧於此有省.)
-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쏘는구나.
(밥 때가 벌써 지났는데) 뭐 밥그릇을 찾느냐!
[평창]
현사스님은 정진(情塵)과 의상(意想)을 끊고 말끔히 훌훌 벗고 텅텅 비어
말끔한 상태에 이르렀으므로 이처럼 말할 줄 안 것이다.
그 당시의 여러 사찰에서 모두 우러러보았다.
평소의 대중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총림의 노스님들이 모두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하나,
만약 세 가지 병을 앓는 자를 만났을 때는 어떻게 맞이할까?”
눈병을 앓는 자에겐 백추를 잡고 불자를 세워도 그는 보지 못하며,
귓병을 앓는 자에겐 어언삼매를 해도 그는 듣지 못하며,
벙어리를 앓는 자에겐 말하도록 해도 말하지 못한다.
이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이 사람들을 맞이하지 못한다면 불법이 영험이 없는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를 소경·귀머거리·벙어리로 안다면
끝까지 (현사스님의 의도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 속에서 죽지 말라”고 했으니,
반드시 현사스님의 의도를 알아야 할 것이다.
현사스님은 항상 이 말을 가지고 사람을 제접하였다.
어떤 스님이 현사스님의 처소에서 오랫동안 있었는데
하루는 상당법문을 하자,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학인이 그 도리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렵니까?”
“해봐라.”
스님이 대뜸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한마디 하고서 내려가자 현사스님은 말하였다.
“옳지 않다, 옳지 않아.”
이 스님은 현사스님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그 뒤 법안(法眼)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지장(地藏)스님이 말하는 이 화두를 듣고서야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에 대한 화두를 알았다.”
이 스님이 “몰랐다”고 한다면 법안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말했으며,
알았다고 한다면 현사스님은 무엇 때문에 “옳지 않다, 옳지 않아”라고 말하였을까?
하루는 지장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이라는 화두가 있었다는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규침(珪琛 : 왕이나 제후들이 믿음의 표식으로 들고 있는 옥판)에
눈·귀·코·혀가 나타나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제접하겠오?”
그러자 현사스님은 그만둬버렸다.
현사스님의 뜻을 알았다면 어찌 언구 위에 매이겠는가?
그가 알았던 것은 참으로 각별하였다.
뒤에 어떤 스님이 이를 운문스님에게 말하자
운문스님은 그이 뜻을 바로 알고서 말하였다.
“너는 절을 올리도록 하라.”
스님이 절하고 일어나자마자 운문스님은 주장자로 떠 밀쳤다.
스님이 뒷걸음질을 치니,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너는 눈 멀지는 않았구나.”
다시 앞으로 가까이 나오라고 부르자 스님이 다시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니,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너는 귀 먹지는 않았구나.”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알았느냐?”
“모르겠습니다.”
“너는 벙어리는 아니구나.”
스님이 이에 깨침을 얻었다.
당시에 영리한 자였다면 “절하라”고 말하였을 때,
바로 선상을 번쩍 들어 뒤엎어버렸을 터이니,
어찌 수많은 말들을 들었겠는가?
말해보라. 운문스님과 현사스님은 아는 바가 같았을까, 달랐을까?
두 스님이 알았던 곳은 모두 한가지였다.
그 옛사람들이 세상에 나와서 베푼 온갖 방편을 살펴보면,
그 의도는 (낚시질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낚시 끝에 있었다.
참으로 입이 아프도록 말해주어서 여러분들 스스로가 ‘이 일’을 밝히게 하려고 하였다.
오조(五祖)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말해주어도 모르고, 한 사람은 알아도 말하지 못한다.
이 두 사람이 찾아와서 참례한다면 어떻게 그들을 분별할까?
두 사람이 찾아와서 참례한다면 어떻게 그들을 분별할까?
두 사람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끈끈한 집착의 결박을 풀어주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며,
이를 분별할 수 있다면 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얼른 신발을 신고 상대의 뱃속으로 들어가 속셈을 헤아리리라.
그래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때 지난 뒤에 밥그릇을 찾겠느냐.”
이는 소경·귀머거리·벙어리로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유마경」 제자품에서) 이르기를
“눈으로 색을 보아도 봉사와 같으며,
귀로 소리를 들어도 귀머거리와 같다”고 했다.
또한 (장사스님은)
눈으로도 색을 보지 못하고
귀로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문수보살은 항상 눈으로 보고
관음보살은 귀를 틀어막는다. 고 하였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눈으로 보아도 봉사와 같으며,
귀로 들어도 귀머거리와 같아야 현사스님의 의도와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소경·귀머거리·벙어리의 의도를 알았느냐?
설두스님의 송을 보아라.
[송]
盲聾瘖啞. 杳絶機宜. 天上天下. 堪笑堪悲. 離婁不辨正色. 師曠豈識玄絲.
爭如獨坐虛窗下. 葉落花開自有時. 復云. 還會也無. 無孔鐵鎚.
소경·귀머거리·벙어리여,(盲聾瘖啞.)
- 이미 말 이전에 있다.
입·눈·귀 세 구멍이 모두 밝다. 이미 하나가 되었다.
방편의 길이 완전히 끊겼네.(杳絶機宜.)
- 종적을 찾을 길이 없구나.
헤아릴 수 있겠느냐? 무슨 관계가 있으랴!
천상천하에(天上天下.)
- 이치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송을 하네. 나도 이러한걸…….
가소롭고 불쌍하여라.(堪笑堪悲.)
- 무엇이 가소로우며 무엇이 불쌍하냐.
반은 밝고 반은 어둡다.
이루(離婁)도 본래의 색을 분별하지 못하는데(離婁不辨正色.)
- 눈먼 놈아.
솜씨 좋은 기술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분명 눈멀었구나.
사광(師曠)인들 어찌 현묘한 음률[玄絲]을 알랴.(師曠豈識玄絲.)
- 귀머거리 놈아. 위대한 공훈은 상을 주지 못한다.
분명히 귀 먹었군.
툭 트인 창 아래 홀로 앉아(爭如獨坐虛窗下.)
- 반드시 이처럼 해야 한다.
귀신의 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지 말라.
일시에 먹통을 타파해버렸다.
시절 따라 낙엽지고 꽃 피는 것만 같겠느냐.(葉落花開自有時.)
- 지금은 무슨 시절인가?
절대로 아예 일이 없다고 이해하지 말라.
오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이 없다.
다시 말하노니 “알았느냐?”(復云. 還會也無.)
- 거듭 게송을 말하는군.
구멍 없는 철추로다.(無孔鐵鎚.)
- 냉큼 꺼져라.
놓아준 것이 아깝다. (원오스님은) 쳤다.
[평창]
“소경·귀머거리·벙어리여, 방편의 길이 완전히 끊겼다”고 하여,
여러분이 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것과, 듣고서도 듣지 못하는 것과,
말하고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 모두를 설두스님은 일시에 쓸어버렸다.
그러므로 소경·귀머거리·벙어리라는 견해나 방편 등의 계교가 일시에 완전히 끊겨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끝없는 초월의 일[向上事]은 소경·벙어리·귀머거리로서
방편 따위가 전혀 없다고 할 만하다.
“천상 천하에 가소롭고 불쌍하다”고 하여,
설두스님은 한편으로는 추켜 올랐다가, 한편으로는 깎아내렸다.
말해보라, 누구를 비웃고, 누구를 불쌍히 여겼는지를.
벙어리라고 비웃었으나 병어리가 아니며,
귀머거리라고 비웃었으나 귀머거리가 아니다.
불쌍하게도 분명 봉사가 아니었으나 눈이 멀었고,
분명 귀머거리가 아니었으나 귀가 먹었다.
“이루(離婁)도 본래의 색을 분별하지 못하는데”라고 하였다.
청·황·적·백·흑 색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봉사이다.
이루는 황제(黃帝) 때의 사람으로,
백 보 밖에서도 터럭 끝을 볼 수 있으리 만큼 밝은 눈을 지녔지만,
황제가 적수(赤水)가에서 노닐다가 구슬을 빠뜨려버려
이를 이루에게 찾으라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고,
설구(契詬)에게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고,
그 후 상망(象罔)에게 찾으라고 하였더니 구슬을 찾아냈다 한다.
그러므로 “상망이 가면 광채가 찬란하고,
이루가 가는 곳엔 하늘까지 물결이 넘실거린다”고 하였다.
이처럼 높은 경지의 한 수는 이루의 눈으로서도 본래의 색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사광(師曠)인들 어찌 현묘한 음률을 알랴.
주(周)나라 때 강주(絳州) 진(晋)의 경공(景公)에게는 아들 사광이 있었는데,
자(字)는 자야(子野)이다.
그는 5음 6률(五音六律)을 잘 알았으며,
산 너머에서 개미 싸우는 소리까지도 들었다.
이때 진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패권 다툼이 있었다.
사광은 거문고를 뜯고 앉아 있으면서도
초나라의 싸움에서 반드시 전공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설두스님이 “그(사광)는 아직도 현묘한 음률을 모른다”고 말한 이유는,
(5음 6률을 잘 구별하는 것처럼) 귀먹지 않았지만 마치 귀먹은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이 높은 곳의 현묘한 음률은 사광이라 해도 알지 못하였다.
설두스님은 말하였다.
“나는 이루도 되지 않으며 사광도 되지 않으리라.
툭 트인 창 아래 홀로 앉아 시절 따라 낙엽지고 꽃 피는 것만 같겠느냐.”
이 경계에 이르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 듯하며,
들어도 들리지 앉는 듯하며, 말해도 말하지 않는 듯하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면서
낙엽이 지는 대로 꽃이 피는 대로 맡겨둔다.
낙엽이 지면 가을이오, 꽃이 피면 봄이라, 각기 스스로 시절이 있다.
이는 설두스님이 그대들을 위해 일시에 소탕해준 것이다.
또 자그만 (방편의) 길을 터주면서 “알았느냐”고 말하였는데,
설두스님은 힘이 다하고 정신이 흐릿하여 “구멍 없는 철추”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이 한 구절은 탁 알아차려야 하니,
머뭇거리면 결국 빗나가버린다.
원오스님은 불자를 들고 “보았느냐”는 말을 마치고서
선상을 한 차례 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들었느냐.”
선상에서 내려오면서 다시 말하였다.
“말할 수 있느냐?”
